우리의 몸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필연적인 과정(過程)을 겪습니다. 늙고 병든 몸은 자연의 원리에 따라 죽음으로 나아갈 뿐이며 다시 청춘을 맞이하게 되지 않습니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는 서복이라는 신하를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내어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선약(仙藥)을 얻고자 하였지만 자신의 수명을 늘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를 끝내고 중국의 천하를 통일한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그 역시 죽음의 운명 앞에서는 필부(匹夫)와 다름없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지며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성직자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수원교구의 김 모 신부님은 살아서 성인(聖人)으로 불릴 만큼 신실(信實)한 사제였는데 70세를 조금 넘겨 돌아가셨습니다. 김남수 주교님이 이 신부님 임종(臨終) 시에 병자성사(病者聖事)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두 세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김 신부님이 숨을 거두지 않으시자 마침내 주교님도 힘드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봐, 김 신부 이제 그만 죽어. 나도 나이가 많아서 이제 얼마 못살어. 나도 곧 따라 갈 테니까 이제 그만 저 세상으로 가.” 그러자 김 신부님이 주교님 손을 꼭 잡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주교님, 그럼 지금 저와 같이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주교님이 손을 홱 뿌리치시며 “에끼 이 사람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라고 하시더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몇 년 전에 신부님의 강론시간에 들었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을 창시하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말기암 등의 판정을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환자들 수백 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이 겪는 마음의 변화를 DABDA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D(Denial) 부정 : 나에게 이런 병이 올 리가 없어.
A(Anger) 분노 :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친단 말인가?
B(Bargain) 흥정: ‘하느님 저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면 이제는 주님만 섬기며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고 하며 하느님께 매달리게 된다.
D(Desperation) 절망 : 그러나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A(Acceptance) 받아들임 : 마지막에 환자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이는 3개월, 6개월 시한부 인생의 판정을 받은 환자의 절망감, 애절함, 생명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잘 표현한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3개월, 3년, 30년을 더 살 수 있겠으나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도 백년, 천년을 더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묵상해본 적이 있나요? 오늘 하루 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정말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엄숙한 운명에 대하여 묵상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장례미사에 참례하면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코린토 1서 15, 55)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죽음에 대한 승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편에서와 같이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시므로 아쉬울 것 없습니다’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신앙이 ‘죽음의 열쇠’라는 것을 깨닫고 이 신앙을 무엇보다 귀중하게 간직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은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여정(旅程)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의 인생은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2019. 1.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