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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의 안타까운 현실 2 (신앙이란 무엇인가?)
전동혁 베드로 신부  (미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한인성당 )
 

 

신앙(信仰)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가장 간단하고 명확하게 정의한 사람은 개신교 신학자 “Paul Tillich”이다. 그는 이렇게 정의했다. “종교란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이다(Paul Tillich, “Theology of Culture”, ed., Robert C. Kimball(NY:Oxford University Press, 1964), p.7-8 ; Religion, in the largest and most basic sense of the word, is ultimate concern).”라고 말이다. 궁극적인 것을 보고, 궁극적인 것을 듣고, 궁극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종교의 핵심, 곧 신앙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철학적 행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궁극적인 바라봄”으로 표현되는 이 신앙은 자연스럽게 “향하여 나아감”과 연관된다. 이로써, 예컨대 기독교를 정의할 수 있겠다. 기독교는 궁극적인 곳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하여 첫걸음을 내디디면, 영원한 분이 영원만큼 다가와서 만나게 되는 종교다(베네딕도 16세 교황). “바라봄”이 이렇게도 중요하기 때문에, 필자는 이 행위를 중심으로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면 신앙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많은 크리스챤들과 다리 역할을 하는 사제들의 삶의 본모습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논고에서 필자가 강조하려는 부분이 바로 여기가 되겠다. 다시 말해서 “어디를 보고 있는가? 보아야 할 곳을 보여주고 있는가? 만약 다른 곳을 보고 있거나 보아야 할 곳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말을 돌릴 필요가 없겠다. 이 글은 “정의를 구현한다는 한국 천주교 사제들이 어디를 보고 있으며, 그들이 정작 보여주어야 할 곳을 보여주고 있는가?”라는 비판의 논고가 되겠다. "본다”라는 이 행위는, 그래서 폴 틸리히의 이 신앙의 정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이 “본다”라는 신학적 통찰은 부산 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인 이진수 신부가 일곱 아들과 어머니의 순교 이야기를 통하여 감동적으로 강의한 적이 있었다. 필자 또한 그 포인트로 논고를 시작해 보겠다. 하지만 그 전에, 필자가 엔도 슈사큐의 “침묵”을 먼저 소개해 보겠다. 서로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시기 바란다. 등장 인물들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말이다. 나아가 이 “바라봄”은 오늘날 한국 천주교 지도자들에게 “도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물어볼 것이며 동시에 독자들에게도 똑같은 물음을 던지게 될 것이다.

 

 

1. “어디”를 보고 있는가?

 

일본의 저명한 작가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라는 책에서 신앙의 본질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일본 가톨릭교회의 실제 박해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아주 훌륭했던 페레일라라는 신부가 배교를 하게 된다. 이 소식이, 그를 존경하던 유럽 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이유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의 제자 로드리고 신부는, 그래서 일본행을 결심한다. 그런데 그 또한 자신의 스승처럼 배교를 하고 만다. 어찌된 일일까? 바닷가에 말뚝을 세워 놓고 밀물이 들어오면 조금씩 체온을 빼앗겨 죽게 만드는 방법을 비롯하여, 상상할 수 없는 온갖 고문이 가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다. 정작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육체적 고문이 아니었다. 그는 고문을 받고 있던 신자들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구멍 매달기, 일명 “아나츠리”라는 고문이 그들에게 가해졌다고 한다. 몸을 거꾸로 매다는데 내장이 아래로 쏠리면 곧바로 죽기 때문에, 노끈으로 온 몸을 묶었다고 한다. 또 머리에 피가 몰려도 죽기 때문에 귀 뒤에 작은 구멍을 내, 목숨줄이 서서히 끊어지는 고문을 가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자신이 고문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한 명씩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이다. 앞서 전임자가 그러했듯이, 이 고통 앞에서 이 신부도 고민과 번뇌에 빠진다. 그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스스로 질문하고, “단 한 명의 소중한 신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께서도 틀림없이 배교했을 것이다”라는 답을 스스로에게 내렸던 것이다. 말하자면 엔도 슈사쿠는 이 신부들의 배교가 단순한 배교가 아니라, 신자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하여 터부시하는 배교라는 행위조차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는 것 같다. 이런 성찰을 통하여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해보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카베오 하권에 나오는 일곱 아들과 어머니의 순교 장면과 비교해 보도록 하자. 마카베오 후서는 6장에서 먼저 율법학자 엘리아자르의 영웅적인 순교의 장면을 전하고 난 후에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의 순교 장면을 7장에서 전해주고 있다. 첫째가 죽고, 둘째/셋째/넷째/다섯째/여섯째 모두 순교당한다. 여섯째 아들이 죽기 전에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한 말이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 자리에 붙여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21-23절). 그리고 막내가 죽기 전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내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7-29절). 이 말을 듣고 막내도 형들과 함께 순교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우리를 딜레마에 빠지게 만드는 신앙, 곧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식의 생명조차 구하지 아니하는 비정한 어머니의 믿음이 소개되고 있다.

 

마치 아들 이사악의 희생 제사를 바치려 했던 저 무정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말이다. 이는 성서학자 폰 라드가 말했던 “이중 충실성의 함정”처럼 보일 수 있다(게르하르트 폰 랏, 장익 옮김, “아브라함의 제사”, 분도소책 시리즈31, 2009, 참조). 신(神)에게 충실하면 아들의 생명을 잃게 되고, 자식을 선택하면 신(神)에게 불충실하게 되는 그 딜레마 말이다. 영원히 풀지 못하는 이 함정 때문에, 사실 누군가가 어느 하나의 행동을 취했을 때 반론을 펼치기가 쉽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답 자체도 함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아들의 생명을 경시하거나 신(神)에게 불충실한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을 사랑하거나 신(神)에게 충실한 길을 선택한 셈이 된다.

 

이는 엔도 슈사큐가 신부의 배교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로 여기려 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에 대한 불충실이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을 선택했다고 말이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이 “흑야”에서 기록한 사건이 떠오른다. 극도의 배고픔에 아버지의 빵을 빼앗는 아들, 그러나 다른 이들이 그에게 달라붙어 결국 시체 두 구만 나딩굴게 된 사건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그는 그 누구도 단죄할 수 없었다. 극도의 배고픔 때문에 한 행위에 윤리적 잣대를 갖다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자기의 빵을 내어주는 자도 있다는 것을, 엘리 위젤 자신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하여 이 성경의 텍스트를 단순히 양자택일이나 이중 충실성의 함정으로 볼 수만은 없다. 잔인하다거나 맹목적인 신앙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행동을 고결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시선”에 녹아 있다 하겠다. 이 아들들과 어머니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유심히 보도록 하자. 이진수 신부는 말해주었다. “만약 그 어머니가 아들들만 보고 있었다면 결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그 아들들이 자신들의 어머니만 보고 있었다면, 그들도 결코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그들이 겪는 고통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궁극적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엔도 슈사큐가 전하는 신부 곧 신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그 신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잘 보시라. 그 신부가 바라보고 있던 신자들은 가슴 아프게도 그 신부가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 궁극적인 곳을 바라보며 순교하고 있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삐에따 상”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아들의 주검을 안고 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로 하여금 무릎 위에 얹혀진 아들을 두 손으로 만지지 않도록 조각했다. 무슨 의미인가? 이 답도 “성모님의 시선”에 있다. 미켈란젤로는 성모님의 시선이 아들을 향하도록 조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처절한 슬픔 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성모님은 슬픔을 넘어 궁극적인 곳을 바라보고 계셨다. 마음과 정신 그 깊은 곳에서 그녀는 “영원”을 바라보고 계셨기에, 사실 성모님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넘어가고 계셨다. 이제 질문은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가 바라보고 있던 것과 달리, 배교한 사제들은 어디를 보고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하여 “사제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겠다. 구체적으로 “그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자이며, 동시에 이를 위해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지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 속에는 한국 천주교의 미래가 달려있을 수도 있겠다. 미리 말씀을 드리지만, 사제는 “성사”를 집행하는 자다. 이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자다. 동시에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 먼저 궁극적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곧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가 정말 궁극적인 곳을 보여주고 있는 존재인지, 그의 직무가 그런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겠다.

 

 

2. 보여주고 있는가? 가리고 있는가?

 

현실로 돌아와 보자. 가톨릭교회는 성사적인 교회이다. 성사란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여주는 도구, 혹은 수단을 말한다. 신(神)은 보이지 않는 순수한 영이시다. 보이지 않고 붙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분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필요하다. 이를 담당하는 것이 Sacramentum, 곧 성사다. 무슨 의미인가?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다리를 뜻한다. 어떤 매개체를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신(神)은 영(靈)이다. 반면 인간은 육(肉)이다.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유비적이지만, 인간은 신과 유사한 지적/영적 능력을 지녔다. 이 능력이 신(神)과 자신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이 때 인간의 정신 혹은 영적 능력은 신(神)에 대하여 성사가 된다. 그것으로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결혼반지는 부부의 사랑을 영원히 보증해주는 증표가 된다. 대화는 나와 너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가가 된다. 말과 글은 어린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도구가 된다.

 

성경은 신의 사랑과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다리가 된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만남이, 아니 모든 삶이 매개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하여 넓은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성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이 성사의 개념을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한다. 곧 보이지 않는 신(神)과 연결되게 해주는 다리, 혹은 보이지 않는 신의 은총을 전달해주는 도구를 성사라고 한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 계시지 않는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길. 눈에 보이거나 손에 붙잡히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바로 교회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성경과 미사, 말씀과 예배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때 성경과 미사, 말씀과 예배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성사가 된다.

 

왜냐하면 이 전례를 통하여 만남의 다리, 곧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분을 보여주는 수단들을 거룩한 일(성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순수한 영이신 하느님을 보여주고 그분에게 이끌어 주는 최고의 성사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성사 그 자체”(Sacrament itself)가 된다. 두 말 하면 잔소리다. 하여 사제는 성사를 통하여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직무를 수행하는 자다. 그러면, 바로 그분이 그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게 된다. 이 구조가 바로 성사적 교회이다.

 

이제 “사제는 누구인가?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는 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해지고 있다. 그는 많은 신도들을 “성사 그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는 자라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사제는 자신의 존재와 직분 자체가 성사가 된다고 말이다. 그는 다리를 놓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대 사제는 신의 얼굴과 마음을 보여주는 일을 하는 자다. 그 만큼 중요하다. 문제는 매개체인 그가 “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가리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Hans Urs Von Baltasar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베일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 딜레마는 사제들에게 괴로운 짐이 되고 있다. 동시에 신자들에게도 버거운 짐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500년 전에, 이 문제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갈등이 또 다른 모습으로 한국 천주교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 괴롭기 그지없다. 다리를 놓아주어야 할 매개체, 곧 신과 만남을 주선해야 할 사제가 신의 얼굴이 아닌 자신의 이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많은 신자들은 그분을 만나지 못해 고통스러워한다. 보여주어야 할 자는 가리고 있고, 보고 싶어하는 자는 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답답하지 않으리요? 하여 필자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하는 바이다.

 

필자의 논고와 관련하여, 복음서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는 대목이 있다. 스승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원로들과 수석사제,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말렸다. 그러자 그분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라는 말씀이 나온다(마태16,21-23; 마르 8,31-33; 루가 9,22). 헐! 별 일도 아닌 걸로 가지고,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 혹시 예수님께서 갱년기여서 그랬을까? 아니다. 잘 아시다시피,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내 뒤로 오세요). 말하자면, “베드로, 너는 내 제자이지 않니? 스승은 내가 아니니? 그런데 너 서있는 위치 보세요. 왜 내 앞에서 나대고 있니? 좀 뒤로 가주실래요?”라는 뜻이다. 신앙은 자신을 앞세우는 행위가 아니라, 궁극적인 분을 앞세우는 행위다. 이 장면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담고 있는 질문, 곧 “도대체 그리스도보다 앞서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사제는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앞서서 말이다.

 

그런데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정치 사제들은 오히려 자신의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 않는가? 감히 그리스도 앞에 말이다. 아닌가? 물론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임에 틀림 없다. 자신들의 행동은 “하느님의 뜻”에서 비롯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이다. 하여 “정의 없이 사랑이 없다”라고 외치는 데에서 그칠 수 없고,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으로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누가 그것을 모르는가? 맞다. 그러나 말만 맞는 것이다. 아니 두리뭉실하게 맞을 뿐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개념이 많은 옷을 입고 나타나듯이, 정의라는 개념도 많은 얼굴을 하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정말 정의의 얼굴이 너무나 다양하고 모호한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그 확신에 오류가 있다면, 폴 틸리히가 “이단”에 대하여 멋지게 정의한 대로 “거기 있으면서 사실은 거기에 있지 않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정의이든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스도보다 앞세우는 것은 우상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1요한 4장 8절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곧 “Deus caritas est”라고 했지, “사랑이 하느님이다”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느님의 속성일 뿐이기 때문에, 곧 하느님께서 사랑보다 더 크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사랑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도 피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검증 없이 자신들의 주장만으로 자신을 정의의 사도 혹은 신의 사신과 동일시한다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바리사이적 오류와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들도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면서, 곧 하느님을 가리키면서 하느님을 가리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고?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어디에다 함부로 갖다 놓는가? 실연당한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위로해주겠다는 바로 그자가 그 여인을 꼬득이는 것처럼, 입으로는 하느님의 뜻/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외치면서 사실은 자기 이념을 앞세우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도구에 불과한 자가 궁극적인 분의 뜻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도구에 불과한 자신의 이념을 전달하는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성사를 집행하는 사제는 “궁극적인 것을 보여주는 자인가? 아니면 가리고 있는 자인가?”라는 양극단의 긴장관계 속에 놓여버린 자다. 그래서 더욱 겸허하게 서있어야 하고, 부족한 자이지만 그 직분이 너무나 중차대하기에 감히 은총을 청해야 하는 자이다. 하여 사제는 사도 바오로께서 고린토 후서 6장 10절에 남기신 신약성서 최고의 선언, 곧 “nihill habentes et omnia possidentes”(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이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 바로 이런 자가 되기를 바래야 한다. 이를 위해 사제는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자, 곧 “to be nothing”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양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된 그를 모든 것인 자, 곧 “to be everything” 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사제는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앞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 사제가 지녀야 할 삶의 모습이 더욱 구체적으로 좁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모습인가? 바로 겸손한 도구로서의 태도다. 다음은 교회헌장 32항에 수록된 성 아오스딩의 주교직분 수락 강론이다. 이 말씀은 세기를 통하여 빛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심장에 영원한 감동을 남긴 아름다운 문장이다.

 

“제가 여러분을 위하여 있다는 것은 나를 두렵게 하지만, 제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나를 위로해 줍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저는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저는 크리스챤입니다. 전자는 직무이고 후자는 은총입니다. 전자는 위험이지만 후자는 구원입니다”(confer, "What I am for you terrifies me; what I am with you consoles me. For you I am a bishop; with you I am a Christian. The former is a duty; the latter a grace. The former is a danger; the latter, salvation." (Serm. 340, 1, cited in LG 32).

 

성 아오스딩의 주교 직분 수락 강론을 들으면, 교회 안에 두 가지 직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Ordo, 곧 위계질서와 같은 직분, 다시 말해서 주교/사제와 같은 직분(ministerial or hierarchical priesthood)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지니게 되는 직분이 그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후자를 보편사제직(Universal priesthood)이라고 주장했다. 약 4백년 늦었지만, 가톨릭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공통사제직(common priesthood), 혹은 거룩한 사제직(holy priesthood)이라고 천명했다. 비슷한 개념이다. 이 직분 혹은 직무는 우리가 세례를 받았을 때 들었던 내용이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말이다. 이 직분보다 더 중요한 직분은 교회 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보다 앞서는 직분도 없다. 주교직도, 사제직도 모두 이 공통사제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직무사제직 자체가 공통사제직과 친교(communion)에 봉사한다. 이는 발터 카스퍼 추기경도 강조한 내용이기도 하다. 물론 이 선언이 직무사제직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10항은 “세례받은 사람들은 새로남과 성령의 도유를 통하여 영적인 집과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중략) 또한 “신자들의 공통사제직(common priesthood)과 직무사제직(ministerial priesthood)이 정도에서뿐만이 아니라 본질에서도 서로 다를지라도,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nonetheless interrelated)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이어지는 문장이다. “그들 모두는 각자 특별한 방법으로 유일한 그리스도의 사제직(One priesthood of Christ)에 참여한다.” 방법이 다르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그분의 사제직에 다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어느 직분이 “위에 있고, 밑에 있고”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성 아오스딩은 직무를 수행하는 사제가 신자들의 구원을 생각하는 자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사제는 자신의 직무를 통해서 많은 양들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communion)하도록 봉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앞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제직분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하여 사제들이 직분에 충실하다 함은 신자들에게 궁극적인 곳을 가리켜 주고, 그들을 궁극적인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곳을 가리는 행위만큼은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 아오스딩의 말씀처럼, 그 직분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 곧 공통사제직(common priesthood)에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이 선포한 가르침의 핵심도, -사실 그 내용을 뒤집으면- 이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 사제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천명이었다.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양들을 어디에로 인도하고 있는가? 도대체 말씀의 잔치에서 어떤 음식을 내어놓고 있는가? 식사하기도 전에 정치/이념 논쟁으로 피터지게 싸우지 않는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가? 그렇게 폭력을 당하고 나면 어떻게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는가? 말씀의 잔치에서 이미 기분이 상해버렸는데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만찬을 즐길 수 있는가? 일방적으로 스트레스를 푼 신부는 맛있게 먹을 수 있겠지만, 위장이 뒤틀린 연약한 양들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방통행식 폭력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이제 질문은 더욱 명확해진다. 도구가 도구의 역할을 못한다면?

 

 

3. 역사의 교훈 (궁극성과 보편성)

 

지금껏 설명했듯이 도구로서의 사제들의 역할, 곧 성사적 직분은 참으로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신(神)의 얼굴을 보여주고 그분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를 가장 앞세워야 할 사제가 그리스도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얼굴, 곧 자신의 이념을 앞세우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우선 성경을 들여다보자. 구약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갑자기 화를 내시고, 심지어 갱년기 분노를 폭발하는 신(神)을 보고 당혹스러워 한다. 사랑의 신(神)이 왜 그토록 분노조절 장애를 가졌을까? 간단하게, 당신이 싫어하시는 죄악 때문이라고 하자.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죄악에 대한 화산폭발의 대부분은 당신과 당신 백성들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는 자, 곧 왕과 사제들에 대한 분노였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바빌론 유배를 겪은 것도, 도구가 도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이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와 끊임없이 충돌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온 삶으로 율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유대교를 쇄신시켰던 주인공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의 잘못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율법으로 신의 얼굴을 가린 잘못이었다. 말하자면 개념적으로 정신적 폭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율법을 가르쳤지만 사실은 자기 행실만을 드러냈고, 율법을 앞세웠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앞세웠던 것이다. 결국 위선자에 대한 책망, 곧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들어가게 한다”라는 마태복음 23장 13절의 말씀처럼,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궁극적인 분의 얼굴을 궁극적인 도구인 율법으로 가리는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렇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중심(中心)에 놓고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앞세우려는 교만의 죄, 곧 인간의 불치병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치유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토록 책망을 들었던 것이다.

 

이는 기독교 세상이 도래했을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 곧 교부시대에도 성사적 도구인 사제들에 대한 질책은 성경 못지 않았던 것이다. 이 불치병 때문에 1054년 동방교회는 집을 나갔다. 아니 분가해버렸다. 가톨릭교회는 재산의 반을 잃었다. 결국 교회를 만신창이로 만든 16C 종교개혁도, 사실 이 문제로 일어났다. 종교개혁가들은 다리를 놓는다는 가톨릭 사제들에 대하여 거의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거품을 뿜었다. 이 심정을 이제는 이해할 듯하다. 왜냐하면 성사(sacrametum)라는 도구는 두 가지 조건에 따라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신의 얼굴을 보여준다면” 성사는 은총의 햇살이 되겠지만, “만약 보여주지 못한다면, 곧 다른 것을 보여준다면” 성사는 행정적 업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전자는 존경과 사랑이라는 월계관을 교회의 머리에 씌워 주었고, 후자는 분열과 아픔이라는 판도라 상자를 교회의 품에 안겨주었다.

 

슬프게도 한국 천주교는 이미 후자의 옷을 입고 말았다. 자신의 관심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작 신앙의 본질은 뒷전이다. 이 결과, 한국 천주교는 적어도 외적인 분열은 아닐 지라도 내적인 분열은 막지 못하고 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의 말씀대로 신앙의 진리에는 “핵심”이 있는데, 정치 사제들에게는 첫째도 이념이요 마지막도 이념이다.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것은 자기들 생각에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되는 이념, 곧 사회주의 이념일 뿐이다. 아닌가? 참으로 안타깝도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200년 전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 보시라. 약 100년 동안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우리 선조들이 국가에 바랬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황사영 백서사건을 일으키면서까지 바랬던 것은 오직 “신앙의 자유”, 이 한 가지뿐이었다! “믿을 수만 있다면”, 이 한 가지를 그렇게도 갈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보시라. 지금은 정말 얼마나 크나큰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 그런데도 온갖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 바로 종교인들이 아닌가? 아니, 정권을 바꾸는 일에 종교가 앞장서는 사태까지 생겼다. 그래서 새 세상이 왔는가? 잔혹한 인민재판과 다를 바 없는 홍위병들의 난동을 광장 민주주의라 부르고, 감정적 선동을 시민혁명이라 정의하고, 패거리 파시즘을 국민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그 반역이 새로운 세상인가? 언론 난동으로 죄가 증명되지도 않은 채, 막수유죄(莫須有罪)로 탄핵시키는 국가야말로 세계 역사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어떤 세상이 왔는가? 그 나물에 그 밥, 오십보백보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 잡은 정권이 그대들이 그토록 외쳤던 세상이었던가? 그래서 Hell 조선이 Heaven 조선이 되었는가? 퍼주기식 무상 복지로 국민을 기만하는 이런 사회주의가 그대들이 외쳤던 하느님 나라였던가? 고작 이런 사회 만들자고 그 난리법석을 떨었던가? 그러나 보라. 오히려 안보가 위협당하고, 법치주의가 붕괴되고, 자유 민주주의가 유린당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주의가 파괴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종교가 궁극적인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 정치이념에 깊이 관여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정말 모르시는가? 중동의 아랍국가들을 보시라. 천 년이 넘도록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결정적 요인이 바로 종교이지 않았던가! 오죽했으면 터키의 국부 케말 파샤가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켜 버렸겠는가? 오죽했으면 조선이 불교를 배척했겠는가? 인도를 볼까? 아니 기독교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십자군 원정으로 몰락해버린 중세는 말할 것도 없겠다. 교회역사 시초에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할례”였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사도회의가 열릴 정도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유대교 전통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문제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결하기 힘든 사태였다. 왜냐하면 다른 민족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아주 낯설었고 또한 받아들이기 힘든 예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선교에 가장 큰 방해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인 기독교인들은 끝까지 할례를 고집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 내용은 사도행전이 전해주고 있다. 또한 장 콩비가 쓴 교회사에도 언급된다(장 콩비, 노성기/이종혁 옮김, “세계 교회사 여행1”, 가톨릭 출판사, 2015, p.44-46).

 

첫번째 공의회에서 사도 베드로는 형제들에게 멍에를 씌워서는 안 된다고 할례 반대를 설교한다(사도 15장). 야고보 사도도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서 유다인들을 위하여 중도 타협안이 나왔다(사도 15, 20). 곧 유다인들을 위해서 할례가 필요한 것이지, 이방인들에게는 할례가 필요없다는 결정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디모테오”와 “티토”다. 흥미롭게도 할례를 반대한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할례를 베푼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 곧 타협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사도 16, 4). 반면 티토는 할례를 끝까지 거절했다(갈라 2, 3). 왜?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즉 유다인 디모테오처럼 할례를 받든지, 혹은 그리스인이었던 티토처럼 할례를 받지 안든지,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었다(갈라 6, 15)! 말하자면 로마서 2장 28-29절의 말씀처럼,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유다인이 아니고, 살갗에 겉모양으로 나타난다고 할례가 아닌 것이다(28절). 나아가 속으로 유다인인 사람이 참 유다인이고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할례란 뜻이었다(29절).

 

잠시 생각해 보자. 사도들이 다함께 모여서 결정한 사안인데, 바오로는 도대체 무슨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첫공의회에 해당하는 결정사항, 그것은 쓸데없는 규정일 뿐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사도들의 결정사항을 사실상 폐기처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행전과 교회사는 더 이상 상세한 결과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타협안은 지켜지지도 않았고 지킬 수도 없었다. 이 이유를 폴 존슨이 정확하게 전해준다. 그에 의하면, 바오로는 이 타협안이 예수의 메시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오로의 반대파, 곧 예루살렘 유다인 크리스챤들도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유다인 공동체를 떠난다. 그리고 바오로와 함께 이방인 선교에 나서게 된다. 도대체 바오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왜 그들과 싸워야 했을까? 바오로는 유다인들의 민족통일주의로부터 예수를 구출해내야 했다. 동시에 예수께서 로마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정치적 메시아로서 인식되는 것을 상당히 우려했던 것이다(폴 존슨, 김주한 옮김, “2천년 동안의 정신1. 살림, 2005, p.124 참조).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위의 책, p.125). 아니, 요한복음 18장 36절이 명확히 증언하듯이, 예수님 당신 자신의 왕국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결국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유다인 크리스챤들은 정통성과 순수성을 고집하면서 독자적으로 기독교를 자칭한다. 그런데 그들이 똘똘 뭉쳐서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예수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며 소외된 자, 가난한 자, 억울한 소수를 위한 그럴 듯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편협한 유다교와 다를 바 없이 되고 말았다. 결국 정의구현 사제단처럼, 열혈당원들이나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편협한 이념을 앞세워 억눌린 자신들의 국가 독립을 위해 로마에 대항했다가,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만을 자초했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이 남긴 보편주의의 유산을 잃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처음 기독교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유다인 크리스챤들이 가장 먼저 그 유산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에 “깊이” 개입함으로써 말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아픈 역사가 되겠다(cf., 한스 큉,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 이종한 옮김, 분도 출판사, 2002).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보아야 할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곳을 보지 못했다. 곧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반면 사도 바오로를 보시라. 그는 편협한 민족주의나 편향된 정치이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다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뿐이다. 이 점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왜냐하면 역사상의 예수는 유다민족이라는 어떤 특정한 민족주의에 갇혀버릴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곧 “궁극성”과 “보편성”을 잃어버리면 모든 토대와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에 그는 단호히 할례를 거부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한 민족의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세대의 구세주이어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오로는 그 어떤 편협한 이념이나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이 문제는 어쩌면 전 세계 모든 나라의 공통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가톨릭교회가 끝까지 할례를 고집했던 예루살렘 유다인 크리스챤들처럼 민족주의나 배타주의와 같은 폐쇄적인 가치관 속에 갇혀 있게 된다면, 결국 궁극성과 보편성을 결여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 자신들이 내세우고 있는 그 이상한 이념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있는 한, 그들은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정작 어떠했을까? 이 점 또한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언급해 보겠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통치 아래에서 유대독립을 위한 정치적 투쟁을 하지 않으셨다. 적어도 외적으로 물리적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그분의 명백한 입장이었다. 이 외적 행위는, 그래서 그분을 추종하는 모든 이에게 가시적인 도그마의 원리가 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필자의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최고의 저항이자 최고의 투쟁이 될 수 있다”라고 말이다. “오히려 그 비폭력이 세상 모든 정의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다”라고 말이다.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형식적인 태도가 변함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하늘나라는 정권을 바꾼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그분께서 정치적 투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추종하는 자들에게 “행위의 형식”이 되어야 한다. 하여 어떤 국가가, 디트리히 본 회퍼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최악의 상황이 아닐 때에는 종교는 적어도 이 행위의 형식을 준수하고 자신의 궁극적인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4. 내일의 태양을 다시 기다리며

 

이제 종착역이 보인다. 필자는 사제와 신자들 모두에게 “어디를 보고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를 통하여 한국 천주교의 안타까운 현실을 다시 비판해 보았다. 특히 다리역할을 하는 사제의 존재와 직분에 대한 정의를 논했다. “보여주어야 할 곳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가리고 있는가?”라는 점을 부각시켜 본 것이다. 왜냐하면 야누스의 얼굴처럼 양면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사제 직분의 현주소는, 교회역사가 그러했듯이 무지개빛 내일을 열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문제를 제기한 자가 좋은 대안을 제시했으면 좋으련만, 별다른 답도 제시하지 못했다. 아니 누구보다도 필자가 다리역할을 하는 도구로서 궁극적인 곳을 가리키고 인도하는 직분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요구한다. “제발 보여주라”라고 말이다. 이 요청을 들어 주기는 쉽지 않다. 하여 이 점은 신자분들이 이해해야 하겠다. 다만 한 가지 요청이 더 있으니, 그것은 “제발 가리지만 말라”는 요구였다. 이는 필자가 사목자들에게 호소한 부분이었다. 이 요청은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에서 미치 앨봄이 모리에게 욥기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는 “내 생각에는 … 하느님이 너-무 심하셨네”(미치 앨봄, 공경희 역,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살림, 2016, p.211-212)라고 대답했다. 사실 사제들이 해도 해도 너무 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들은 이념을 궁극적인 자리에 놓았고 투쟁이라는 마차에 정의를 태워 말고삐를 잡았다. 결국 궁극적인 곳에 정치라는 휘장을 둘러 신자들이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 그들이 보여준 궁극적인 곳은 궁극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념이었고 자기 자신의 생각이었다. 자기 자신의 관심사였고 자기 자신의 편견이었을 뿐이다. 곧 궁극을 핑계삼아 궁극적인 분이 아닌, 자기 자신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그래서 진심으로 바랬던 것은 “제발 궁극적인 곳을 가리지 말라”라는 요구였다. 이는 정당한 요청이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를 사랑하고 있는 많은 신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들은 목자를 은총을 전해주는 도구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 정의는 틀린 말이 아니다. 사제는 다리이고 수로이며 그릇이다. 다리를 따라 걸어가면 육지로 건너갈 수 있게 된다. 수로에 물을 넣으면 그 수로를 따라 물이 공급된다. 그릇에 음식을 담으면 그릇의 모양대로 담기게 된다. 무슨 말인가? 사제 자신이 곧 성사라는 뜻이다. 성사는 그 자체가 궁극적인 곳을 가리키고 있고 궁극적인 곳으로 인도하는 도구 그 자체다. 그러니 사제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이며 얼마나 존귀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인가? 그 존재가 이미 원천과 연결되도록 축성되었고, 그 직무가 영원으로 안내하도록 설계되었다. 마치 손만 대면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했다던 동화 이야기처럼, 사제는 자신을 만나는 자들로 하여금 “궁극적인 곳, 원천, 영원”과 연결시켜 준다. 나아가 그곳을 향하여 기쁘고 희망 가득 찬 마음으로 달려가게끔 만든다.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사제 직무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 필자가 직무 자체를 거스르는 자들의 직무를 결과적으로 칭송했다는 점이다. 존재 그 자체를 왜곡하는 자들의 존재를 미화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필터가 문제”라던 바로 그의 지적 말이다. 필터 그 자체가 오염되었을 때, 도구 그 차제가 오염되었을 때, 바로 그것이 최고의 문제라던 그 한탄 말이다. 하여 더욱 안타깝다. 많은 신도들이 진심으로 사제들을 믿고 따르고 있다. 그토록 신뢰하고 한없이 아껴준다. 조건없이 순명하고 사랑해 준다. 그러나 지금껏 말했듯이, 그것은 사제들이 “궁극적인 곳, 원천, 영원”을 보여주고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곳을 가리고 있는가? 그대들의 이념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그대들의 관심사가 그토록 우선되는가? 그대들의 정의가 참으로 궁극적인 것인가? 그 모든 것들이 궁극적인 것보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분보다 영원하며 원천보다 정말 우선되는가? 궁극적인 곳을 보지 못하면 도착하지 못하고, 원천을 망각하면 본질이 변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법이다. 하여 하늘의 구름이 태양을 가리면 따스함이 사라지듯이, 궁극적인 곳을 가리고 원천을 차단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한없이 사나워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마르틴 루터가 교황에게 헌사한 “당나귀의 비유”가 아직도 가슴을 찌르고 있듯이, 도구가 주인인 줄 착각하면 그 도구는 아무도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부담스러워서 말이다.

 

한편 “보여달라는 것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고, 보기 싫다는 것은 늘상 보여주는 자가 앞을 가로막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불평하는 신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다. 궁극적인 곳을 보지 못하면 가장 괴로운 처지, 곧 희망을 상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누구든지 분통이 터지고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십분, 아니 백분 그 심정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신앙의 질문은 예외 없이 똑같이 적용된다. 그대들은 어디를 보고 있는가? 중간 매개체를 보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그대의 잘못이다. 누가 거기를 보라고 했는가? 나를 보세요. “넘어서” 보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여 그대 앞에 어떤 자가 가리고 있다고 하여 삐지거나 화내거나 돌아서서 반항을 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결코 칭찬할 일이 아니다. 삐지는 것은 애들이 하는 행동이다. 생각해 보시라. 학교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퇴를 할 것인가? 마음에 드는 선생님이 나타날 때에 비로소 공부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대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태도는 “남편의 행동이 이렇게/저렇게 바뀔 때, 자신도 이렇게/저렇게 하겠다”라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이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그에게 양도하는 격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제들이 바뀐다면” 그 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겠다는 것인가? 필자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바뀌지 않는다. 신념을 바꾸는 것은 신앙을 바꾸는 것만큼 어렵다. 하여 그런 행동은 칭찬할 수 없다.

 

또한 신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는 스스로 신자임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대들은 한국 천주교에 화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를 낸다는 것은 그 안에 몸담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높이 칭송하는 것은 그가 참으로 고매한 품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무나 하는 일을 한 것에 박수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박해자들의 고통을 견뎌낸 것처럼 온갖 번뇌를 맞닥뜨려야 한다. 왜냐하면 어두운 밤은 단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반드시 빛을 갈망하는 희망이 녹아있는 법이다. 그래서 사제 안에, 교회 안에, 전례 안에 신의 얼굴이 자취를 감추고 성령의 산들바람이 사라지고 영혼이 메말라가는 사막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처럼 걸어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곧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라는 히브 11장 1절의 말씀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궁극적인 곳을 바라보고 걷는 자가 바로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어두움 한가운데에서도, 곧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서라도 자신과 함께 하시는 그분이 자신의 손을 꼬옥 붙잡고 계심을 체험하는 자가 바로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영이 내 손을 붙잡고 계신다. 그렇다! 희망은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 희망은 성령으로부터 쏟아진다. 성령께서 주시는 희망은 성경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를 간직하고 있는 희망이다. 무슨 말인가? “존재의 용기”에서 폴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이 희망은 믿음의 대상인 신(神)이 사라져버린 순간에도 그 어두움의 문턱을 넘어서게 해주며 절망 속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때에도 존재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폴 틸리히, 차성구 옮김, “존재의 용기”, 예영, 2015, p.222-226). 하여 사제들이라는 그 엄청난 방해꾼들이 앞을 가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교회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은, L.J. 수에넨스 추기경께서 “성령은 나의 희망”이라고 노래했던 바로 그 성령께서 수많은 양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겠다. 마산 교구장이신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님께서 성 아오스딩에 관한 특강을 하시면서 남기신 마지막 결론도 이 말씀이셨다.

 

“하느님의 전능하심, 그것은 하느님의 철저한 무능하심이었다”라고 말이다(2015년 창원 사파성당 특강). 신(神)의 부재(不在)하심과 무능함은 궁극적으로 승리하고야마는 역설적인 사랑의 힘으로 드러난다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연약한 구유와 무기력한 십자가의 역설 안에 모든 크리스챤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놓여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렇다! 신앙의 길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쳐라” 하신 루가복음 5장 4절의 말씀처럼 “더 깊은” 무엇인 것이다. 말하자면 신앙의 본질은 그 이름에 걸맞는 더 깊은 무엇을 추구할 때 체험되는 것이지, “사회/국가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단면일 뿐이며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한국 천주교 사제들은 바로 이 방식으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려고 한다. 참으로 애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희망의 성령이 계시는 한, 교회의 내일은 어둡지만은 않다. 아니 어두울수록 빛은 더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신앙의 혼돈스러움이 놀라운 기독교 도그마를 탄생시킨 원인이 되었던 것처럼, 이 시대의 혼돈과 역사의 아픔이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서있는 한국 천주교를 제대로 붙들어 놓을지 모르겠다.

 

 

나오면서

 

필자는 한국 천주교의 안타까운 현실 1편에 이어, 2편을 만들어 보았다. 1편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사회회칙과 사회주의에 관하여, 그 유사성과 차이에 대해 논했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르다”고 말이다. 사회회칙은 “인권”의 중요성을 가르쳐 왔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필자는, 한국 천주교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너무 충실하여 교회가 추구하지도 않는 정치/사회주의 노선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으로 말미암아 경제원리를 무시한 퍼주기식 복지에 열을 올린다거나 대기업에 대한 좌파적 적개심을 표출하고, 또한 카타리파식 도덕적 잣대로 정당한 역사와 정권을 단죄하는 등등의 좌편향된 그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무엇보다 필자는 그들이 사회회칙의 주된 관심사인 “인권과 노동”을 왜곡/해석하면서 휴머니즘의 옷을 입은 사회주의의 운동을 펼치는 것에 대하여 비판했다. 교회를 다시 살린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렇게 왜곡할 수는 없다고, 세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정치 문제로 바꾸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반면 2편에서는 “신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다른 각도에서 비판의 수위를 높여 보았다. 신앙은 궁극적인 곳을 바라보는 것이고, 이 바라봄을 도와주는 자가 바로 사제이기에 사제직분의 중요성에 관하여 논평해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베드로가 걸림돌이었듯이, 사제들이 걸림돌로 서있을 수 있는 위험을 경고했다. 필자는 종교가 정치나 이념, 혹은 세속의 파워를 바라보게 되면 궁극적인 곳을 놓치고 원천을 잃어버릴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천주교를 비롯하여 다른 종교들까지 자신들의 신앙보다도 정치적 이념을 더 앞세우고, 나아가 사회주의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안타까운 현실을 비판해 보았다. 병든 국가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병든 종교는 궁극적인 곳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말 못할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많은 신도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비록 무명의 한 시골신부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 희망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위안을 드리고 싶었다. 위안이 되었기를 바래본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벌써 500년이 지났다.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명백한 교훈을 남겨놓는 법이다. 어떤 교훈을 남긴다는 것일까? 바로 “반복이 교훈”이다. 또다시 더 이상 사제가 필요없다는 신학적 논쟁이 불타오르지 않기를 바란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버려지듯이, 한국 천주교의 사제직이 그런 논쟁에 휩싸일까 걱정이다. 필자의 생각이 한 바탕 꿈에 지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필자가 한국 천주교를 비판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기 전에 헤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소리를 한 것이다. 괘씸죄는 적용하지 마시길. 필자는 지상의 예수님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 살 만큼 살았으니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걱정해야 하는지 정도는 잘 안다. 필자는 국가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교회도 지극 정성 사랑하는 자다. 교회를 걱정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죄가 되는가? 참고로 필자는 국교사(국가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장이다. 회원은 필자 한 명 뿐이다. 혼자서 임명제청을 하고 민주적 방식으로 다수결에 의해 회장이 되었다. 약관을 만들어 회원들(1명)의 동의를 얻어 인준했다. 만장일치는 무효라는 탈무드에 근거하여 이 모임을 만들었다. 드디어 한국 천주교 사제단에 다른 의견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기뻐해 주시길 바란다.

 

이 글을 마치면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바는 “신앙에는 핵심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의 지적이다(프랑수아 바리용, 심민화 옮김, “흔들리지 않는 신앙”, 생활성서사, p.20). 그분의 이 말씀은 “신앙의 진리에는 순서 또는 서열이 있다”라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을 인용한 것이었다. 이는 가톨릭 교리서를 책임졌던 쇤 보른 추기경께서 가톨릭 교리서의 해설서를 “신앙의 핵심”으로 이름지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여 필자가 이 논고에서 말하고자 한 바도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 곧 신앙의 “궁극성”과 “보편성”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 터하여 다음의 주장을 펼쳐보았다. 바로 성 아오스딩의 말씀처럼 누구보다도 먼저 사제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자는 것과 동시에 같은 목장에서 살고 있는 신도들 또한 언제까지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존재들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청컨대 그 어떤 이념으로도 궁극적인 신앙의 핵심을 가리지 말아주시길 간절히 바라며, 동시에 보이지 않더라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릴 곳을 향해 달려가는 자 되시기 바란다(2디모 4, 7). 긴 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하다.


입력날짜 : 2017-08-02 (21:27), 조회수 :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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