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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의 안타까운 현실
전동혁 베드로  (미국 신시나티 성당 신부)
 

 

들어가면서

 

격랑의 파도를 맞닥뜨리고 있는 이 혼돈의 시대에, 필자는 조국과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특정 이념에 편승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념의 시녀가 되어 사회혼란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을 보고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 하여 이 논고를 통해 한국 천주교가 왜 이런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살피고자 한다. 동시에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동반자로서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교회가 자기중심적 정의의 관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음도 아울러 비판하고자 한다.

 

이는 교회가 세상 앞에서 지녀야 하는 겸허한 자기반성의 촉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오해의 근거가 되고 있는 “가톨릭 사회교리와 사회주의”에 관하여 중점적으로 논할 것이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이념에 관해서 말이다. 만약 두 이념이 같다면, 한국 가톨릭교회의 정치/사회적 색채는 그 당위성을 얻을 수 있겠다. 그 행위가 신앙적 신념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완전히 다르다면, 그들의 정치성향은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 행위들이 이념적 오류에 의하여 행해졌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단언한다. “완전히 다르다”고 말이다. 하여 이 비평은 교회를 이끌고 있는 사제단에게, 특히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게 던지는 간절한 질문이 되겠다. 또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내포하고 있다. 왜 그대들은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 관하여 진실을 왜곡하는가? 왜 한쪽으로만 해석하여 적용하는가? 정말 사회회칙을 꼼꼼히 읽어 보았는가? 왜 신앙을 정치화하며 또 그것을 당연시하는가? 무슨 중차대한 근거로 그 많은 양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고 그들의 정치적 자유를 침해하는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교회의 분열보다 중요한가? 그 주장에 fact를 체크해 보았는가? 검증해 보았는가? 그대들의 주장이 틀림없는 진리라고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또한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거룩한 미사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한 도구로 변질시킬 수 있는가? 바라건대, 필자의 이 어리석은 “견해”를 잠시라도 그 많은 양들의 고민으로 여겨주시길, 동시에 심각하게 양들의 생명과 신앙이 달려있는 문제로 깊이 번뇌해 주시길 바래보겠다.

 

 

1. 미묘한 차이

 

대중강연을 하는 이들 중에 역사의 fact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컨대 영국이 아편을 팔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인용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나 정작 중국은 그 전쟁이 아편전쟁이었다는 사실 자체도 몰랐다. 이것은 영국의회에서 자중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무역을 하자고 하면서 아편까지 팔아서야 되겠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편은 주요 무역품이 아니었다!

 

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진리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만날 수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가 제자들에게 말한다. 외상술값을 갚아달라고 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카더라” 정보가 아니라, 책을 읽어본 자라면 이 말이 대단한 철학적 언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상상하듯이 소크라테스가 술을 마시고 외상장부에 그어 놓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게 되면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런데 아무 연고가 없는 자는 국가에서 지정한 국선무당이 제사를 치러 주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돼지머리에 해당하는 자기 머리값을 대신 지불해 달라는 웃지못할 부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이 정도는 별다른 내용도 아니다. 좀 틀렸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다. 그런데 다음의 예들은 심각하다.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내뱉었다는 사례가 그것이다. 구시대를 끝내고 근대라는 새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프레임을 바꿀 수 있는 모토가 필요한 법이다. 이에 갈릴레오는 좋은 선전도구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가톨릭교회를 과학적 지식조차 거부하는 몰상식한 구시대의 낡은 조직으로 가라앉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지동설을 몰랐던 것도 아니거니와 애써 천동설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그보다 앞선 코페르니쿠스가 성직자였다는 것이 증거라면 증거일 것이다. 교회는 이 발견을 대환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종교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과학으로 신학을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곧 과학으로 신학을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런 사안에서는 fact가 참 중요하다. 하지만 달려가는 마차가 갑자기 멈추기 어려운 것처럼, frame이 바뀔 즈음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길과 인도를 구분하지 않고 속력을 내고 달린다. 시간이 지나 가톨릭교회는 억울한 면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수레바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 수단은 용인된다.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말이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된다고 했던가? 이런 낡은 frame수법은 지금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한다. 유명한 대중강사인 모 교수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도주한 것에 빗대어 이승만 대통령이 백성을 버리고 가장 먼저 도망쳤다고, 혼자 살려고 한강다리를 폭파시켰다고 강연했다. 대중강연이니까 사소한 내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소함이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면 말은 달라진다. 작은 불씨 하나가 산천초목을 태우듯이, 이 미묘한 왜곡된 프레임은 그를 비열한 자로 만들어버렸다. 앞뒤 내용을 잘라내고 그것만을 이야기함으로써 말이다.

 

글이란 전체 문맥을 이해해야 할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사건도 앞뒤의 상황을 아울러 설명해야 한다. 생략하면 안되는 것을 생략할 때, 의도된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결과는 개념의 장난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아직까지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불분명한 개념을 쓰는 것이다. 예컨대 광복과 건국의 개념에서 이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독립한 것인가? 독립된 것인가?”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껏 혼란을 겪고 있다. 또 사람들이 쓰고 있는 “진보”라는 개념이 칼 마르크스가 사용했던 공산화의 최종적 과정, 곧 “processing”이라는 개념임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어이없는 일이 생기고 만다. 그의 이 개념은 검증되지도 않았고 인정받지도 못했다. 결국 “진보”라는 개념은 망상에 불과하지만, 이 개념을 쓰는 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대단한 지식인이나 되는 것처럼 이 단어로 자신을 포장한다.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런 fact와 뉘앙스에 있어서 지식인은 정말로 그 책임이 막중하지 않을 수 없다. 노암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에서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흥미롭게도 아니 흥미를 넘어서 경악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자신의 주장을 배반한 자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신이야말로 지식인의 책무를 거스른 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자, 나아가 폴 포트의 정권을 옹호한 자였다. 그는 인권과 자유라는 도덕적인 범주에 갇혀, 정작 미군철수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보시라! 전쟁 후 수백만 명의 살육에 대하여 그가 어떤 변명이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바로 그자가 이제는 한국의 사드배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가 한국민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생명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자로 생각되시는가? 필자는 개념의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될 수 있는 오해와 그 엄청난 결과에 대하여, 그리고 전체 문맥을 이해하지 않고 부분적 문장만을 의도적으로 따로 인용할 때에 생길 수 있는 악의적 결과에 대하여, 또한 외적 주장과 내적 목적이 다를 때에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생겨날 수 있음을 언급해보았다. 이를 염두에 두고 가톨릭 사회회칙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2. 가톨릭 사회교리와 사회주의

 

교회는 어려운 시대마다 시대의 표징이 되어 왔다. 특히 19세기부터는 사회문제에 깊이 개입하여 세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삼았다. 그 첫번째 관심이 1891년에 반포된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회칙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19세기 산업화의 결과로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의 권익에 관한 사회적 가르침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론이 러시아를 강타했음을 생각해보자. 가톨릭교회도 소수 자본가들의 독점을 우려하여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노동조합의 결성과 국가의 개입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재산공유화는 단호하게 비판했다. 회칙 2항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이런 악의 치유를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부자들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서 사유재산을 없애야 하며 그 대신 모든 이를 위한 공동재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유재산을 공유화하고 또 모든 재화를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때에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투쟁을 종식시킬 수 없는 그들의 이론은 노동자 계급에 손해를 입히며, 그 밖에도 정당한 소유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국가의 임무를 변질시키며,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부당하다.” 이어서 3항은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모든 사유재산을 공유화한다면, 그들은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투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자기의 자산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자기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권리와 희망을 빼앗아버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라고 말한다.

 

바로 그 다음 4항에서는 “더 나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해결책이 명백하게 정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유 재산권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다른 항목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교회의 가르침은 명명백백하게 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첫번째 사회회칙은 가톨릭 사회교리의 “대헌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말하자면 헌법에 준하는 선언, 곧 사회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방향과 울타리”를 결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회칙의 본질적 내용은 노동자들의 인권에 관한 천명이지만, 그것은 곧 “human right”를 말하고 있고 지향하고 있다.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교회가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의 이념을 배척하고 있음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유익함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가톨릭교회가 사회주의 이념과 비슷한 가르침을 전하고,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그 폐해를 말하고 있을 지라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은 사회회칙의 첫 시작부터 명백하게 구분되었다.

 

남미의 해방신학이 대두되어 교회가 갈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교회의 입장은 명확했다. 해방이라는 성서적 정신으로 사회운동이 일어났지만, 그래서 그 투쟁을 90% 이상 동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베네딕도 교황에 의해 “칼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운동에 다름 아니다”라는 이유로 배격당했다. 왜 거부당했을까? 왜 교회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동기를 외면하고 그토록 냉정한 태도를 취했을까? 가톨릭교회는 그들의 외적 주장에 속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들만이 옳다는, 그 만(only)이라는 오류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것은 “hic et nunc”, 곧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는 완전하게 이루어낼 수 없는 허망한 이념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회주의의 이념과 다르지 않았다. 천국을 약속하면서 지옥을 만들고 마는 그런 약속 말이다. 필자의 이 주장에 허파가 뒤집어지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해방신학을 평가절하하지 말라고 말이다. 또한 사회주의의 이념과 가톨릭/기독교의 가르침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서로가 “human right“를 그 핵심에 두고 있다고 말이다. 맞다. 그러나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실제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서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힘들다. 사회주의의 주장은 기독교의 복음처럼 들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다가온다. 해방신학과 더불어 그 누구보다도 휴머니즘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리고 정말 그 정신으로, 진정한 휴머니즘의 마음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참으로 인간적인 손으로 넘어진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민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껴안는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카멜레온처럼 옷을 갈아입고 있을 뿐이다!

 

 

3. 사회주의 이념의 모순

 

이 세상은 두 사람이 영원히 반으로 쪼개 놓았다고 한다. 바로 “예수”와 “마르크스”다. 어쩌면 기독교적 혁명과 마르크스의 혁명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매력이 녹아 있는 까닭이다. 필자가 여기서 떠든다고 하여 사회주의의 이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그렇다고 조용히 있을 수도 없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영원한 친구”이면서 “영원한 적”이기 때문이다. 하여 언제까지나 서로 대화해야 하지만, 끝까지 서로 싸워야 한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이 두 실체를 구분하기 위해, 동시에 “친구”가 아닌 “적”임을 분간하기 위해 비판해 보겠다.

 

여기서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이 내세운 주장을 살펴보자. 우선 그들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식량은 1/N로 나누면 되겠다. 그런데 집은 어떻게 나눌까? 어떻게 모든 집을 똑같이 나눈단 말인가? 그러려면 지금의 모든 집을 전부 허물고 똑같은 평수에 똑같은 색깔의 집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했다고 치자. 그래도 문제는 생긴다. 누구는 서울에 살고 누구는 저 남쪽 진주에 살아야 한다. 어찌해야 할까? 한 달에 한 번씩 바꾸어서 살까? 누구는 바다 근처에, 누구는 강변 근처에, 누구는 산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어떻게 균등하게 배분할 것인가?

 

이것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재산과 권력은 어떻게 평등하게 나눈단 말인가? 예컨대 군대를 어떻게 나누고 언론방송을 어떻게 나누며 권력을 어떻게 똑같이 나눈단 말인가? 결국 1인 독재자가 그 모든 것을 장악하고 국가를 통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닌가? 그 평등이라는 이념은 이미 그 시작부터 평등일 수 없는 불평등일 수밖에 없다. 결국 나누어준다는 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며 평등이라는 것은 개인의 말살을 의미할 뿐이다.

 

레오 13세 교황이 선포한 “새로운 사태”라는 회칙은 “인간의 권리”를 말하면서 이 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조했다. 어째서 그랬을까? 왜 어째서 인간의 권리가 사유재산과 관련이 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금만 뒤로 돌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로크는 인간의 자연적 권리를 말하면서 재산권을 말했고, 제퍼슨은 행복 추구권을 말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의 자유권을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다. 사유재산이 없으면 인간의 권리도, 행복도, 자유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시라. 노예가 무슨 자유와 행복이 있었겠으며 인간의 권리를 보장받았겠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출발선은 바로 사유재산권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사유재산을 빼앗으려고 한다. 강탈하려고 한다. 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높은 세금을 매기고 활동을 제한시키려고 한다. 사회주의의 목적을 감춘 채, 불평등 해소라는 도덕적 이유를 앞세워서 말이다. 기업도 사유재산에 속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대들의 주장이 이와 유사하지 않는가? 저 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이게 나누어 주자고 말이다. 그것이 정의라고 말이다. 분배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이를 결코 정의라고 하지 않았다!

 

혹자는 필자의 이 주장에 비웃을 것이다. 자신들은 구시대의 유물인 공산주의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물론 아닐 것이다. 누구보다도 인본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가치, 좀 더 나은 복지사회를 지향하고 있음을 잘 안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유사하거나 결국엔 같게 된다. 왜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지금 필자는 필자를 반박하는 그대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그대들의 가족과 많은 사람들의 행복 추구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길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통해 실현된다.

 

가톨릭 사회회칙도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중요한 원리를, 왜 정의구현 사제단은 말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작은 진실을 강조하여 큰 진실을 놓치고 있는가?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결과로 이끌고 있다. 그들은 차이와 불평등을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불평등을 부각시킨다. 그들은 차이의 단면만을 본다. 차이는 없어져야 할 나쁜 요소로 보이나 사실은 가치를 생산해 낸다. 차이가 없으면 경제활동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근대 민주주의는 의아스러울 정도로 자본주의와 함께 출발하게 되었다. 하여 근/현대 민주주의의 첫걸음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것이었다. 가톨릭교회도 사회회칙을 통해 이를 분명히 인정했다. 대원칙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신부들은 회칙의 한 부분만을 인용하여 강조한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라는 말을,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라고 왜곡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신부는 적어도 수 백명, 수 천명의 양들을 생명과 구원으로 이끄는 책임자이자 안내자다. 그런데 사회회칙을 가깝게 접하지 못하고 깊이 이해하지 못한 양들에게, 어찌하여 균형잡히지 않은 자기중심적 해석만을 전하고 자기 관심사만 강조하는가? 예컨대 아무 근거도 없이 도덕으로 경제를 단죄하려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이야기 하나 해보겠다. 7세기 유럽 인구가 약 1,500만명이었다. 11세기에는 약 3,500만명이었고 14세기에는 약 6,500만명이었다. 토지가 늘어나고 새로운 품종(예컨대, 콩)이 경작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한 인구가 5천만명이다. 어떻게 이 많은 인구가 살 수 있는가? 이는 경제발전 때문이다! 저출산 대책을 마련한다고 지원금 어쩌고- 한다. 기업의 그 많은 규제를 풀어보시라. 인구가 늘게 된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법칙이다. 어째서 경제를 도덕으로 규정하려고 할까? 이상할 정도로 자본주의에 대하여 도덕적 광기, 아니 미신적 광기를 띄고 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인권/정의/평등/복지”라는 주장 밖에 없다. 도덕적인 범주 안에 갇혀 있는 그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법칙에 대해서는 악마 대하듯 한다. 물론 사회회칙이 인권과 도덕을 강조하고 강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법칙의 틀 안에서 선언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배척해 왔다. 그 이론과 본질, 나아가 그 실상을 명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오래된 미래”처럼, 미래를 현재로써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다시 순환논리의 오류를 말하게 되지만, 자본주의는 빈익빈/부익부의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를 국가가 강제로 없앨 수 없다. 그것은 그 국가 자체가 헌법에 위배된다. 권력을 잡으면 헌법을 고쳐서라도 평등한 사회로 만들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국가는 파괴된다. 더 이상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나라다. 물론 평등은 인류 사회가 그렇게도 이룩하고자 했던 영원한 가치임에는 틀림 없다. 하지만 이 평등은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위에서 성립된다. 너와 나의 동등함은 너와 나라는 각 개체가 존중받을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개인이 사라진다면, 곧 개인의 능력과 재산이 사라진다면 국가도 사라진다. 그래서 개인의 재산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탈취해서는 안 된다.

 

이는 평등과 복지라는 대명분을 내세우더라도 함부로 강제할 수 없는 일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강제화하면, 그것이 바로 도덕적 국가에 의한 자본시장의 파괴가 된다. 왜냐하면 근/현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토대는 국가의 “시장경제 불간섭”이라는 대원칙에 의해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인권과 인본을 주장하는 바로 이 자리가 사실은 갈림길이다. 이 갈림길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가 인본과 복지로 연결된다. 대기업에 대한 증오가 소외되고 울타리 밖으로 내몰린 이들에 대한 연민과 하나 된다. 시장경제 법칙을 거부하는 운동이 기독교적 사랑이 된다.

 

이 선택이 바로 사회주의의 길이다. 이 자리에서 사회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마치 땅 속 깊은 곳에 녹아 있는 마그마가 솟아오르듯, 억눌려 있던 인간의 감정이 폭발하는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이 화산폭발을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왜냐하면 명분만 거창한 도덕 지향적 반시장주의와 복지 지향적 사회주의로 이를 실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직시해 보자. 인권을 외치고 정의를 부르짖고 평등을 주장하는 그들의 이념은 결국 폭력적인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광화문에 걸려있었던 그 무시무시한 그림들이 역사의 진실을 암시해 준다. 불평등을 초래한 자들을 다 목잘라 죽이고, 불법을 저지른 자들을 전부 사형시키고 인권을 유린한 자들의 인권을 말살시킨다. 자코뱅당의 그 잔인함과 무엇이 다르며 문화대혁명의 그 인민재판과 무엇이 다른가? 레닌은 자신이 비판했던 로마노프 왕조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통치했고 더 잔혹한 방법으로 살육의 잔치를 벌였다.

 

자유를 부르짖었던 그들은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정의를 내세워 인권을 억압했으며 평등을 이유삼아 재산을 약탈했다. 왜 이런 결과가 생길까?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적 평등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법 위에 서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야 자신의 신념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권력을 잡아서 법을 바꾸려고 한다. 그 법으로, 소위 “합법적인” 그 법으로,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폭력적인 그 법으로 강제적인 평등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시라. 자신이 사실상 그 법 위에 앉아 있지 않는가? 하여 사회주의는 결국 평등도 인권도 자유도,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필자의 이 주장이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처음으로 되돌아가보는 것이 가장 좋을 수 있다. 케케묵은 논쟁일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이 이념을 들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든 자는 필자가 아니다. 그릇된 이념을 들고 사회를 흔들고 있으니, 필자가 직언을 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미켈란젤로가 아닌 이상, 처음부터 잘못된 조각상으로 어떻게 다비드 상을 조각하겠다는 생각을 하시는가?

 

 

4. 한국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1974년 원주교구장이셨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결성된 단체다. 유신반대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한국정치 역사의 특수한 상황에서 조직된 이 모임에 대하여, 그리고 그 목적과 업적에 대해 필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아니 참으로 높이 평가했다. 정말 자랑스러웠다. 정의는 실천하는 정의일 때 비로소 정의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사회교리가 공동선을 추구하고 그 핵심에 있어서 “human right”에 대한 마음이 녹아있기 때문에, 정의구현 사제단은 인간의 인권을 유린하는 그 어떤 세력에도 당당히 맞서 왔다.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예컨대 구조적인 사회악이나 비민주적인 억압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적어도 이 행위들은 가톨릭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인권의 마지노선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투신은 시대의 표징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사회정의의 예표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정신과 본질이 변질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필자만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인권은 평등으로, 자유는 민족으로, 반자본주의는 복지라는 개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사회주의 이념투쟁의 노선으로 갈아탔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수호는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으로 바뀌고 북한 동포를 돕자고 앞장서면서도 정작 북한의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역설이 생기고 말았다. 말하자면 조직의 논리로 변질된 것이다. 이 돌연변이는 이제 국가의 정당한 통치행위에도 앞장서서 반대하고 나섰다.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는 사람처럼, 이제는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역사의 fact마저 도덕적 잣대로 부정한다.

 

만약 부정부패라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면, 2천년의 그 엄청난 부정부패에 휩싸인 가톨릭교회의 정통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도대체 역사가 무엇인가? 정말 부정하고 싶은 그 아픔까지도 껴안는 것이 아닌가? 그대들이 주장하는 역사는 단죄받은 카타리파의 오류와 무엇이 다른가? 깨끗하고 아무 문제없는 사실들만 기록해야 진정한 역사인가? 이것도 모자라, 이 기울어진 성향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말씀의 잔치에서 정치는 약방의 감초가 되어 버렸고, 미사는 기쁨의 잔치가 아닌 투쟁의 장소로 변질되었다. 미사에 참여하는 그 많은 신자들은 사제의 일방적인 정치적 발언으로 고통을 겪고 정치적 자유를 침해당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이를 폭력이라 생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의의 외침이라고 주장한다. 그 많은 양들의 양심과 정신에 씻을 수 없는 폭력을 행사했으면서 말이다. 이제 순수했던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변곡점을 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필자가 지켜본 결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은 이제 하나의 이데올로기 정치집단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니면 적어도 여러 반국가적 사회주의 단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초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법이다. 왜 교회가 갑자기 정치판으로 바뀌었을까? 박해받고 고난당하는 십자가의 모습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무기력하지만 강력한 비폭력의 연약함은 어디로 갔는가? 제의와 로만 칼라는 또 하나의 파워, 곧 교황청이라는 힘이 아니고 무엇인가? 힘으로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힘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세상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더욱이 수도자는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을 받아왔다. 이제 그들마저도 자신의 표징을 정치적 투쟁의 옷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정말 온유하고 인내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는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칼을 든 무사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는 성직자들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입에서는 “정의”라는 단어 외에 다른 말을 들어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아! 슬픈 현실이여! 어쩌다가 한국 천주교가 이렇게 망가지고 말았는가? 이제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어떤 정의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이중잣대, 혹은 주관적 잣대를 갖다 대고 있으니 그 정의가 모호할 뿐이다. 어떤 때는 정치정당적 정의를 부르짖고, 어떤 때는 사회선택적 정의를 주장한다. 그들은 입맛에 맞게 한 번은 자동차 파업에 나타나고, 어느 새 국회 앞에 등장하는가 하더니, 홀연히 제주도에서 구호를 외친다. 이제 무엇하는 사람들인지 그들의 직업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짜라투스트라인가? 예언자인가? 기자인가? 정의의 순교자인가? 의로운 재판관인가? 그래서 정말 묻고 싶다. 정의를 부르짖으면 그는 정의로운 자가 되는가? 그 정의가 진짜 정의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정의가 우물 안의 개구리식 정의인지, 아니면 아전인수격 정의에 불과한지 모르지 않는가? 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검증하기 힘든 토대 위에 서있게 되면, 결국 자신을 위험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이미 그 위치에 서성거리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긴장관계에 놓여버렸다. 교회는 “내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실행하는 이 시대의 예언자로 자처하지만,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흉으로서 질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선구자로 나서지만, 교회를 더욱 혼란의 길로 안내하는 눈먼 안내자가 되고 말았다. 나아가 정의를 외치는 잔다르크이고자 하지만,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이단자가 되고 있지 않는가? 물론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 또한 반대편의 주장에 벌집처럼 반격을 받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객관적 판단의 기준

 

그렇다면 객관적 기준은 없을까? 사제단과 신자들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있는 지평선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객관성은 신자들이 신부와 함께 사회교리를 연구하고 이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의 시작은 회칙의 핵심과 전체적인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지 않고 편집하여 전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하여 몇 가지 사회회칙을 간략히 소개해본다. “새로운 사태”를 반포한지 40년이 지나 “40주년”이라는 회칙이 발표되었다. 이 회칙은 앞서 사유재산권과 소유권에 관한 내용을 담은 “새로운 사태”를 부연설명하는 회칙이다. 다시 강조하는 바이지만 “개인의 재산권은 불가침의 권리여서 국가도 빼앗을 수 없다”라고 재천명한다(21항). 여기서도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권리가 다시 강조되고 있다(25항), 하지만 투자된 자본을 보상하고 돌려주는데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생산물과 이윤이 모두 노동자의 권리에 속한다는 주장은 달콤한 독약이라고 선언한다(26항). 보다시피 여기서도 사회주의를 위한 자리는 찾아볼 수 없다.

 

1961년 요한 23세 교황은 “어머니요 스승”이라는 회칙을 반포한다. 새로운 사태 반포 70주년이 되던 해였다. 2차 세계대전을 치루었고, 한국 전쟁이 있었고, 미국과 소련이 냉전체재로 핵무기를 가속화하던 때였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세계가 등장했던 시기다. 회칙의 대상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였다. 여기서 “사회화”(socialization)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오늘날의 복지개념이다. 교황께서는 빈부차가 커지면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충분한 임금, 완전한 고용, 사회복지제도 등등을 마련하여 부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1963년, 요한 23세 교황은 “지상의 평화”도 반포한다. 여기서 인간의 권리, 특히 생존의 권리, 윤리문화적 권리, 종교자유의 권리가 천명된다. 노동의 보수가 정의의 기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함을 강조한다(20항). 이 두 회칙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가톨릭교회가 사회주의 이념을 대폭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사회주의 이념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 가톨릭교회가 “human right”의 정신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동자의 권리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다른 내용들을 설명하지 않는 것은 필자의 논지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1967년 바오로 6세는 “민족들의 발전”을 반포한다. 이 회칙은 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의 경제/사회에 관한 내용에 중요한 사항 몇 가지를 덧붙인 것이다. 주로 저개발국에 관한 지원을 말하고 있다. 잘사는 나라로 하여금 혼자만 살지 말고 나눔을 실천하라는 내용이 되겠다. 1981년, 드디어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이하여 요한 바오로 2세는 “노동하는 인간”을 반포한다. 필자가 “드디어”라고 말한 것은 이 회칙에서 노동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언에서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는 “정의구현”이라는 임무를 선언하고 있다. 잠시 들여다 보자. 노동문제는 사회문제의 핵심을 이룬다(2항). 노동의 문제를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한다(4항). 7항은 노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천명하고 있지만 유물론적 이념을 철저히 배격한다(7항). 노동자들의 결속을 정당하게 강조하고 있다(8항). 11항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는데 노동과 자본에 관한 투쟁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러 폐해를 다루지만, 분명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철학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보시다시피 가톨릭 사회회칙은 사회주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처럼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명시적으로 명확하게 마르크스 와 엥겔스에 의한 사회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그래서 몇 가지 내용들을 인용해 본 것이다.

 

“새로운 사태” 반포 100주년을 맞이하여 선포한 “백주년”을 비롯하여 가톨릭교회는 노동의 문제를 참으로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 하지만 이 모든 회칙의 핵심과 가르침은 사회주의 이념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행태에 대해서도 많은 선언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자체는 배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시스템 위에서 해결방안을 찾고 있다 하겠다. 이 비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가톨릭 사회교리가 사회주의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근거인 셈이다. 동시에 이 사회회칙들이야말로 교회의 사회에 관한 객관적 기준이 된다. 이 회칙의 핵심과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따라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사회주의적 이념으로 기울어, 그것도 가톨릭의 가르침을 빙자하여 왜 자신의 이념을 신자들에게 강요하는지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촉구한다. 균형잡힌 가르침에 충실하라고 말이다. 자의적으로 객관을 주관으로 바꾸지 말라고 말이다.

 

 

6. 주관적 판단의 기준

 

참고로 근자에 이르러 문제가 되어온 것이 해석의 문제이다. 철학사에서는 이미 과거지사이지만 말이다. 이 해석은 정말 해석의 문제를 낳고 말았다.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포괄적(包括的)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어떤 문제를 한 테두리 안에 몽땅 싸그리 집어 넣어버리는 것이다. 간편하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셈이다. 세상에 “포괄적인” 것 만큼 포괄적인 것이 없다. 이는 심각한 주관적인 판단의 문제를 낳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최악의 재판 중의 하나로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이번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도 포괄적인 법리해석이 적용되고 말았다. 포괄적인 해석만큼 애매모호한 것이 없다. 여기서 칸트의 위대함이 다시 부각된다. “어떤 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법을 만들 수 없다.”라는 그 통찰 말이다. 아무리 그 법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 법을 적용하는 자가, 주관적 판단으로 이 법이 아닌 저 법을 적용해 버리면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어쩔 수 없음”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결국 회의주의(skepticism)를 웃게 만들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정의구현 사제단이 정의의 문제를 들고 정면에 등장했다. 그런데 그들도 결국 주관적 판단의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정의의 문제를 어디까지 적용해야 할까? 바로 이것이 문제다. 사회회칙의 핵심에는 인권에 대한 정신이 녹아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인권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문제는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이다. 물론 선을 그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주관적 판단이 빛을 발휘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정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여기서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하고 핵심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유권해석이라는 대원칙이 있듯이,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판단의 지혜로 삼아야 한다. 허황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자신 안에 내재된 이 원리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객관적 기준이 모호할 때, 이 원리는 기준이 되었다. 철학자들은 이 원리를 “이성”에서 발견하여 “상식”이라고까지 불렀다. 가톨릭교회는 “자연법”이라고 불렀다. 이 원리에 의해서 철학자는 진리의 확실함을 찾았고, 성인은 덕을 찾았고, 종교는 신(神)을 찾았다. 이 원리로부터 터득한 기준들이 또 다시 세상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자등명/법등명”이라는 불멸의 깨달음을 남긴 누군가에 의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관과 객관의 투쟁”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잘 알고 있다. 진리의 판단이 그 만큼 어려운 까닭이다.

 

판단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 많은 법과 규정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위대한 스승을 받들고 성인을 따르며 군자의 가르침에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닌가? 불완전한 우리는 그래서 객관에 의지하여 판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객관이 바로 권위다. 성경이 되겠고 공의회가 되겠고 사회회칙이 되겠다. 이를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자의적으로 객관을 주관으로 바꾸어서도 안 된다. 물론 받아들이는 자에 따라서, 받아들여지는 내용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한계이지만 그렇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다시 정의구현 사제단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제 그들은 모든 인권문제에 관여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자동적으로 말이다. 저 중대한 사건부터 이 조그만 사건에 이르기까지 임의적으로 판단/결정한다. 그러니 그 정의가 “선택적 정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더 자세히 보면, 그 정의는 결국 정치정당적 정의임을 알게 된다. 이는 상대적인 정의에 불과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해준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정당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필자는 A라는 정당과 A’라는 사람을 지지한 신부 중에서, 바로 그 사람이 부정부패에 휩싸였을 때 비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객관성을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정의와 진리를 함부로 입에 올린다. 또한 자기 주장만으로, 자기 외침만으로 자신을 진리와 동일시한다. 아무 근거도 없이 말이다. 아무 근거도 없이 스스로 도덕의 스승이 된다. 옳음의 기준이 된다. 예언자가 된다.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저 저쪽 어딘가에 서 있을 뿐이면서 말이다. 그렇다! 그들이 광화문에 서있으면 진리가 된다. 반면 대한문에 서있는 자들은 악이 된다.

 

정의의 기준도, 진리의 기준도 자기 자신일 뿐이다. 아무 근거 없이 말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잣대가 어디 있는가? 만약에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광우병 파동으로 그 난리법석을 떨었던 시국미사는 어찌하면 좋나? 거룩한 미사를 길거리까지 들고 나가더니만, 결국 거짓임이 판명되지 않았는가? 한미 FTA 반대미사는 어떠한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 시국미사를 드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반대의 결과가 나와버렸으니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닌가?

 

이처럼 지금 선택한 진리가 시간이 지나 거짓으로 바뀐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책임을 지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목청이 터져라 외쳤지만, 결과적으로 신의 얼굴에 먹칠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가? 하여 필자가 호소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정의를 내세울 양이면, 교회를 등에 업지 말고, 성경을 들먹이지 말고, 하느님을 내세우지 말고, 그저 조용히 시민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신념을 외쳐라. 지금까지 교회는 사회문제가 생겼을 때, 냄비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성적 판단을 되찾을 때까지 신중하게 기다리면서 판단해 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선봉대에 서서 선동을 하고 있다. 신적 권위까지 끌어들여서 말이다. 교회가 그대들의 것인가? 진리가 그대들의 것인가? 하느님이 그대들의 것인가? 무슨 근거로? 물론 필자의 주장 또한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이 말을 남길 수 밖에 없겠다. “Time will tell.”

 

 

나오면서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사태”를 시작으로 많은 사회회칙을 선포하여 세상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등불이 되어왔다. 이러한 표징적 사목이 벌써 100년을 훌쩍 넘었다. 과연 가톨릭교회의 사회회칙은 20세기 현대사회가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차/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교회는 세상의 문제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침묵했기 때문에 발생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적극 나섰다. 그렇다! 복음의 빛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고, 신도들을 올바로 이끄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사회회칙을 통하여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자 했다. 이제 더 이상 사회회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명확해진 사실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이 세상의 방관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곧 교회의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하여 세상의 아픔이 곧 교회의 아픔이요, 세상의 눈물이 곧 교회의 눈물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운명은 세상의 운명과 함께 할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운명의 한가운데 20세기의 세계는 격동의 시대였다.

 

가톨릭교회는 세상과 함께 하기 위해,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하지만 노동을 말하면서 모든 인간의 인권을 천명했다. 인권은 핵심이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도 사회주의가 똑같은 주제를 들고 세상에 출현했다. 그리고 천국을 약속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처참한 불행을 겪었고 인권은 유린당했다. 자유도 평등도 없어졌다. 가톨릭교회는 이 괴물과 싸워야 했다. 가장 싸우기 힘든 적이 이단인 것처럼, 가장 무서운 적이 내부의 적인 것처럼, 자신과 비슷한 적과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가톨릭교회가 사회 회칙을 통해 사회주의를 배격하고 경계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군과 적군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싸우는 중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장교에 해당하는 성직자가 바로 적군의 선봉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군인으로 말이다. 참 슬프기 그지없다. “새로운 사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쪽을 비판했지만, 근본적으로 한쪽 편을 들었다! 다른 회칙들도 마찬가지이다. 가톨릭교회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격동의 시기에도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등불이 되어왔다. 교회의 Dogma는 이 세상의 정의를 현실에서 완벽하게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는 중요한 포인트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이념이 영원히 실현될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 고백이 인류사회의 가장 진솔한 고백에 속할 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과 천국은 동일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사회주의자들과 친구가 된 정의구현 사제단은 교회의 신앙이 아닌, 그들 친구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들은 정의의 투쟁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교회의 가르침인지 사회주의 이념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기 힘든 홍어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세상 앞에서 그저 침묵하고 살아야 하는가? 필자가 이 주장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세상의 고통과 불의 앞에서 점잖은 양반으로 사는 것이 신앙인인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고통에 중립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길가로 나가야 한다고 촉구하셨다. 감동적인 말씀이다. 왜냐하면 불의를 보고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만큼이나 악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앞세우고 그들 뒤에서 비겁한 침묵을 지키는 자 되어야 한다고 종용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진리를 가르쳐야 하며 그들과 함께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했듯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정치/사회 문제에 너무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지 않는가? 사회주의 이념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기준이 제시될 필요가 있겠다. 하여 소극적 의미의 헌법 20조의 국가와 종교의 분리가 아닌, 적극적 의미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정교협약(concordatum)을 체결하는 것도 좋다. 최악의 상황이 아닌 이상, 국가와 교회는 서로를 존중해주는 불간섭조약을 맺는 것이다. 아무 기준도 없으니, 사제들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닌가? 기준이 없으니 교도권의 가르침도 소용이 없다. 왜? 자기 이념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이 정의가, 자기 신념에 의하여 정치적이고, 상대적이고, 포괄적이니, 이 불명확한 정의에 어떻게 어떻게 신도들이 따를 수 있는가 말이다. 하여 정치정당적인 정의는 안 된다. 어떤 정당과 사람이 진리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포괄적 정의도 안 된다. 주관적 판단의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원칙적으로 중립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종교는 전투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으로 세상 한가운데 서있을 수 있었는가? 십자가의 무기력함이었다! 참으로 안타깝도다! 무릇 종교는 그릇이 되어야 하는 법이다. 달라이 라마는 말씀하셨다. “종교란 선한 마음의 사원을 짓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표징, 그것은 너를 껴안는 가슴을 간직할 때 빛을 발한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 누구라도 포용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마음이 그러했다. 명동성당은 세상이 지혜를 구하는 화두의 장소였고,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평화의 안식처를 제공했으며 세상이 어지러울 때 어른이 되어주었다. 인권의 최후 보루였고 시대의 따뜻한 징표였다. 세상이 아프고 아파도 그래도 쉴 곳이 있는 엄마의 품이었다. 자비와 관용이 넘치는 곳이었기에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곳이었다.

 

추기경님과 주교회의의 어르신들이 성명서 한 장이라도 발표하면, 그래도 정치권은 귀를 기울였다. 이 고향의 정원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참으로 슬프기 그지없도다! 온유와 포용은 사라지고 차디찬 정의의 칼날만 번쩍인다. 십자가 아래에 서있는 사제는 대중적 광기에로 이끄는 선동가, 혼란과 위기를 부추기는 정치꾼, 분열을 획책하는 이단자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참으로 슬프도다! 십자가의 정의는 어디로 갔는가? 연약해 보이나 가장 강력한 외침, 비폭력이나 그 어떤 힘보다도 강한 힘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보다 더 큰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념이 신앙 위에 서있고, 정의가 사랑 위에 군림하며 자기가 신(神)의 자리에 앉아있는 한국 천주교의 안타까운 현실이여! 쓰러진 교회를 짊어진 성 프란치스코에게 망가진 국가까지 떠넘기는구나!

 

 


입력날짜 : 2017-05-31 (09:01), 조회수 :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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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 하여라~
성령은 비둘기처럼 내려 오..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
하느님은 존재 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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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교여행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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