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분열에 목을 매는 교회의 주교와 사제들
10월 20일자 매일미사에서 복음말씀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가 생각하느냐? 아니다. 나는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루카 12,51)
예수님의 이러한 복음말씀을 표면적으로 가장 잘 따르는 성직자가 있다면 아마 대한민국의 주교와 사제들일 것이다. 2015년 11월 14일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 네거리에는 10만 여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이른바 ‘제1차 민중총궐기대회’라는 것이다. 이들은 “가자 청와대로! 뒤집자 세상을!”이라고 부르짖으며 쇠파이프, 각목, 철제 사다리, 철제 새총도 준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그냥 두었더라면 이 나라의 권부인 청와대마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이며 대통령마저도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불법 폭력시위에서 시위대는 29명이 다쳤지만 경찰은 113명이 다쳤고 경찰버스 50대가 파손되었다.
11월 16일 저녁에는 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인국 신부가 시국미사를 봉헌하면서 지금의 시대를 ‘학살의 시대’로 규정하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 모두 죽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납시다.’고 하면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그의 선동 강론 중 일부이다.
‘부산과 마산시민들은 79년 부마 항쟁으로 돌아갑시다. 광주사람들은 80년 5월 항쟁으로 돌아갑시다. 서울시민들은 87년 시민항쟁으로 돌아갑시다. 방방곡곡에서 일어납시다. 친일세력들이 들고일어났는데 우리가 가만있으면 되겠습니까?’
이 판국에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와 정의평화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11월 17일 시위 중에 물대포를 맞고 다친 백남기 씨를 문병하였다. 그런데 두 분이 말씀하신 것이 참으로 가관이다. 김희중 대주교는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줄 수 있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하며,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생명경시 사상의 결과이며, 생명을 소중히 생각한다면 이렇게 무자비하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라며 경찰의 폭력시위에 대한 대응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인 유주교는 "평범하게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셨고, 이런 분이 열심히 일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닭몰이해서 잡듯이 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백남기 씨는 평범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니라 대학1학년부터 시위현장을 전전한 골수 운동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희중 대주교는 죽창을 휘두르고 철제 새총을 쏘면서 경찰이 하마터면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었던 극렬 폭력 시위대에 대하여는 일언반구 자제를 부탁하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두 분 주교님은 부상한 경찰은 외면하고 일생동안 시위판을 전전하던 골수 데모꾼 백남기 씨의 병원을 찾으면서 신자들을 실망시켰다. 그러면서 경찰을 폭행한 시위꾼들의 폭력 불법행동에는 일언반구 말 없이 일방적으로 경찰이 폭력을 휘두른 것처럼 사태를 오도하였다.
백남기 씨는 서울의 한복판을 마비시켰던 폭력시위를 막았던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지 317일만인 2016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이들은 경찰의 정당한 공권력 행사를 ‘살인 정권에 의한 농민사망’으로 매도하면서 대대적인 선동에 나섰다. 건전한 양식을 지닌 시민으로서 이러한 인간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고인은 신장병을 앓고 있어 의사는 투석을 권고하였지만 가족이 거부하였다. 신장병은 투석을 하게 되면 당연히 수년 이상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며 백남기 씨는 정상적으로 내부의 장기들이 기능하고 있으므로 만일 뒷날 신장기증자가 나타난다면 얼마든지 소생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투석마저도 거부하면서 고인의 생을 고의적으로 일찍 마감하게 한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시위 당시 쓰러진 백남기씨를 가격한 것으로 의심되는 ‘빨간 우의의 사나이’와 같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사인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절대 부검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들은 진상규명을 외치면서도 경찰 폭력에 의한 사망으로 결론 내려놓고 막무가내로 부검을 반대하고 있다. 좌익의 특성인 이른바 ‘추정과 예단’에 의해 물대포에 의한 죽음으로 추정한 다음 그대로 결론을 내는 방식이다. 이곳에 또 다시 정치사제들이 ‘가톨릭 집중행동’이라는 이름으로 팀을 만들고 부검 영장집행만료시간인 10월 25일까지 영장집행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백남기 씨 시신을 지키면서 가장 극렬하게 선동에 나서고 있다. 틈만 나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분열과 반역행위에 앞장서는 이들을 어떻게 교회의 성직자로 부를 수 있겠는가?
정치사제들은 교회의 신자들에게 화해와 용서, 일치를 말하는 대신 터럭만한 구실만 있으면 폭력세력과 합세하여 정권퇴진 시위에 가담하고 길거리 미사 등으로 나라의 분열을 부채질하는데 몸과 마음을 바친다. 이들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집요하고 모질기 짝이 없는 암적인 존재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무엇인가?
처음의 복음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부 주교와 사제들이 행하듯이 극렬하게 반국가적인 분열에 앞장서라는 뜻이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답을 낼 수 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재물과 권력, 명예가 주는 평화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재물과 권력이 주는 세상의 평화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하느님을 내 마음속에 모실 때 복음의 참된 기쁨이 내 가슴속에 녹아들고 분열을 넘어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는 파스카 축제기간에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한사람을 풀어주는 관례에 따라 바라빠와 예수님 둘 중 누구를 풀어줄 것인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었다. 그들은 바라빠를 풀어주라고 외쳤으며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현세적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세에서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셨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이들 현세적 메시아를 간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 속에 외롭게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거센 함성에 파묻히고 말았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한 지금 우리에게 ‘단지 하느님을 가져다 주셨다.’ 지금도 교회에서 현세적 메시아를 자처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바로 참된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가져오겠다고 현세에서 유토피아를 외치는 사람들의 함성은 지금도 한국의 교회를 흔들고 있다. 이들이 바로 2천년 전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쳤던 이스라엘 백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수님의 참된 복음정신을 이 세상에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현세에서 하늘나라를 이루겠다고 소리치는 이단의 목소리에 파묻혀있다.
하늘나라는 현세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의 교회는 230여 년전 평신도가 중국에 가서 세례받고 묵주와 고상과 성경책을 가지고 와서 천주 교리를 연구하기 위한 강학회를 열면서 시작된 세계사에 유례없는 자랑스러운 교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랑스러운 교회는 2천년 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로 그러한 세력, 탐욕과 이단에 물든 천주교회의 사제들로 인하여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비유를 여러 번 말씀하셨으나 실제 현세의 유토피아, 공간적인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신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하늘나라)는 신약성경에서 120차례나 등장하지만 하늘나라는 영토적인 의미를 지닌 현세의 나라를 뜻하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기도를 마치고 공생활을 하시면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은 바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져다주신 것’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은 내면에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써 내면이 사랑으로 넘쳐나고 이 사랑이 이웃과 사회로 번져나갈 대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될 것임을 예수님은 깨우쳐 주신 것이다. 광야에서 사탄이 현세의 빵(물질)과 권세, 부귀영화를 가져다주겠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면서 단호하게 현세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예수님께서 분열을 가져오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을 때 분열은 참된 일치를 위한 바로 전단계로서의 내면의 갈등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마르크스처럼 인간의 물질적인 어려움을 해소하면 이 세상에 유토피아가 오리라는 거짓을 전하는 이단자가 지금 우리 교회에 넘쳐나고 있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을 경감하기 위하여 가진 사람들의 희생과 자선을 강조하는 한편, 무엇보다 기도와 사랑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든지 사람은 원죄의 영향으로 나약한 본성을 타고 났으며 세상의 물질, 탐욕, 권세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이 때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육의 욕망과 현세에서의 성공, 물질적인 풍요, 권력, 명성을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온전히 세상의 것을 버린다고 할 때 내면에서 갈등과 분열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성경의 구절이 바로 사회교리이다.
오늘날 현세에서 ‘지금 여기’에서 하늘나라를 약속하는 사탄들이 교회를 이단과 탐욕으로 물들이고 있다. 이들은 교회의 사회참여를 위하여 사회교리가 성경의 가르침보다 앞선다고 하면서 예비자, 그리고 청소년에게까지 사회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회교리는 하늘에서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성경에서 비롯된 교리이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보듯 성경은 모든 면에서 이미 사회교리를 충분히 담고 있다.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루카 16, 19-31)는 사회교리의 정신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부자는 성경에서 실제 특별한 악행을 저질렀다는 설명은 없다. 그러나 그는 지옥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라자로에게 물 한방울로 자신의 혀를 적셔달라고 애원한다. 부자는 하느님을 잊었고 이웃을 잊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잊었으며 오로지 자신의 부와 쾌락만을 좇았기 때문에 죽음 이후 타오르는 불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 역시 초대교회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잊었던 적은 없었다. 11월 말경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읽혀지는 ‘최후의 심판’ 때의 염소와 양의 비유 역시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 베푼 것이라는 복음말씀을 담고 있다.(마태오 25, 31-46) 이들이 주장하는 사회교리는 성경에서 비롯된 ‘올바른 사회교리’가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이단에 빠진 자들이 사회교리를 주장하는 이유는 시기심과 미움, 적개심에 빠져 부자들을 타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키며 노동자 • 농민에 의한 해방과 혁명을 부르짖기 위함이다.
이단과 탐욕에 대한 경고
바오로 사도는 제자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 6장에서 다음과 같이 이단과 탐욕에 대하여 경계하는 말씀을 남겼다.
누구든지 이단을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맞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교만으로 눈이 멀어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논쟁과 말다툼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그런 데서 시기, 분쟁, 중상과 못된 의심,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에서 돌아섰으며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간에 끝없이 번져갑니다. (티모테오 1서 6, 3-5)
오늘날 이단에 빠져 끝없이 남을 중상비방하면서 온갖 논쟁과 쓸모없는 다툼에 병적인 열정을 쏟는 정의구현사제들, 교만, 질투, 중상모략과 비난에 빠져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성직자들이야 말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탐욕과 이단에 빠진 무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