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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과대망상증 환자의 십자가
김원율 안드레아  (송파동 )
 

 

9월 18일자 부산교구 주보 ‘사회의 복음자리’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한지도 모름서? 


이균태 신부(복산성당 주임)  


자신의 잘못이나, 관리 소홀, 혹은 관리부족으로 병을 얻게 되었을 때, 쉽게 십자가라고 부른다. 자기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남에 의해서 겪게 되는 아픔이나 고통, 힘듦을 십자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말 안 듣는 자식, 집안일은 나몰라라 하는 남편, 철없는 아내 등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그 자식을, 그 남편을, 그 아내를 십자가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 데나 함부로 십자가를 갖다 붙이지 말라.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이나 힘듦을 나 아닌 너를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짊어질 때에 겪게 되는 그 아픔과 힘듦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소중한 생명과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제주 강정의 구럼비를 지키고, 성주의 참외밭은 지키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썩어 죽어가는 4대강을 더 이상 나몰라 하지 않기 위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해직노동자들을 더 이상 죽음으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부자들 간의 온갖 불평등과 차별을 일소하고,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하고, 안전한 사회 건설을 위해서, 두 주멱 불끈 쥐고, 어금니를 깨물며, ‘죽음으로 치달아가는 문화’에 저항하는 사람, 이런 이들이야말로 십자가를 쥔 사람들이며, 무엇이 중한지를 알고, 그 앎을 삶으로 드러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마태 23, 17, 19 참조)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쉬운 길을 버리고, 힘든 길을 스스로 택해서 걸어간 사람들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여겼고, 태생적 차별인 사농공상과 신분제도가 국법으로 정해져 있던 그 시대에 평등세상을 꿈꾸었고, 그런 세상을 실제로 누렸던 사람들이었다. 오늘, 그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백년도 못 살 인생, 그거 하나 편하자고, 천년만년 천주님과 함께 누릴 영생을 포기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먼저 이 글을 쓴 이균태 신부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는 십자가는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 있고 예수님의 발자취는 이웃에 있지 않고 제주의 구럼비 바위나 성주의 참외밭에 있다고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남기신 진리는 조용한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선동하며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균태 신부는 인간은 뱃속에 들어가는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허파에 들어가는 바람으로 산다고 믿고 있음이 틀림없다. 교구의 모든 신자들이 읽는 부산교구의 주보에 이런 글이 실렸다는 것이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사람이 게으름과 탐식으로 인하여 비만으로 고생한다면 ’자업자득‘이라고 할망정 이를 ’십자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자식과 아내, 남편으로 인하여 겪는 고통은 십자가가 아니다?‘ 이균태 신부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며 최소한 길거리에 나서서 정의, 생명, 평화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외쳐야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필자뿐 아니라 많은 신자들은 이균태 신부의 궤변에 황당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필자가 평소에 생각하는 십자가의 진리에 관하여 이 신부에게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한다.  


십자가의 진리는 조용하며 가까이 있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진리는 참되며 이슬같이 맑다. ‘이웃을 사랑하라’ 이 안에 모든 십자가의 진리가 들어있다.  


‘말씀은 가까이 있다. 말씀은 하늘에 있는 것도, 바다 저편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말씀은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마음에 있으므로 누구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 (신명기 30,11-14)  


우리는 이웃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 반드시 강정마을에서 광화문에서 밀양에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조용하다. 프랑스의 정치가, 드 메스트로는 ‘진리는 오류와 싸울 때 결코 화를 내지 않으나 오류는 진리와 싸울 때 절대로 조용한 법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 신부는 길거리에서 목소리높이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성주 참외밭에서 세월호 농성장에서 반정부 선동하며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일까? 글쎄요? 그런데 이들이 십자가가 아니라 김정은의 지령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십자가는 참되며 이슬처럼 맑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은 입만 열면 ‘가난한 사람들’을 내세우지만 실상 이들의 마음속에는 시기심과 탐욕만이 가득하다.


수난을 앞두고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나중에 은돈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요한 12,3-7) 


헌금과 교무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강정마을에, 광화문의 농성장에 쏟아 붓거나 가로채는 사제들이 오늘날의 유다 이스카리옷이 아닌가? 제주의 구럼비를 지키고 성주의 참외밭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고 바다를 지키는 해군기지 건설이나 북한의 핵공격을 막기 위한 사드배치는 평화를 포기하고 생명을 질식시키는 행위인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면 수백, 수천억원의 국가예산의 낭비보다 해안에 지천으로 깔린 현무암 바위덩어리가 더 중요하고, 북한의 원자탄이 터져 남한인구 몇 백만 죽는 것보다 성주의 참외밭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신부 말마따나 정말 ‘뭣이 중한지도 모름서?’라고 되묻고 싶다.  


지금 평신도들은 중세시대의 무지렁이들이 아니다. 평신도들은 이균태 신부처럼 머리가 텅 비어있는 사제보다 훨씬 세상일에 전문가들이며 ‘뭣이 중한지’도 다 안다. 허파에 바람만 들어있어 길거리에서 선동과 분탕질치는 것이 정의요 평화요 생명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정치사제가 감히 평신도에게 “백년도 못 살 인생, 그거 하나 편하자고, 천년만년 천주님과 함께 누릴 영생을 포기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라고 훈계하고 있다. 정말 백년도 못살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이균태 신부에게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균태 신부는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이 세상을 하직하는 정녕 불쌍한 존재이다. 


북한에 가서, 전국의 아름다운 처녀들을 뽑아 기쁨조로 하여 주지육림 속에 지내는 3대세습 독재자에게는 ‘영생을 빕니다’, ‘김일성 장군님 조금만 오래 사시지 아쉽습니다’ 등 온갖 아첨을 떨고, 2천5백만 주민의 고혈을 뽑은 돈으로 호화접대를 받고서 남에 내려와서는 민중봉기나 선동하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의 망령을 여기서 보게 된다.  


감히 그 주제넘은 입으로 거룩한 순교자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이균태 신부는 아마도 자신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나 일제하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던 독립투사 쯤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은 바로 가난한 이웃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일상에서 이들과 사랑을 나누면서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고 있다. 치유불가능한 과대망상증에 빠져 무조건 정부를 반대하고 정의를 외치면 그것이 십자가의 길인 줄 착각하는 이런 어리석은 신부가 쓰는 글을 그대로 주보에 싣고 있는 부산교구의 주교님도 참 한심한 분이다.


 

입력날짜 : 2016-09-25 (07:02), 조회수 : 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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