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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목자들아!"에 대한 구마신부의 댓글
구마신부  
 

 

대수천에 올라온 글을 보다가 우연히 8월 22일에 올라온 김원율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목자들아!라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은 두 개의 성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말씀들을 근거로 성직자들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쓰신 김원율이란 분이 성서 내용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몇 글자 적어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사람들 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첫째, 김원율씨는 이 구절을 마태오 23-22로 인용하셨다고 표기하셨는데, 천주교에서는 이런 식의 성서 표기법이 없습니다. 혹시나 하여, 마태오 복음 23장 22절을 말한건가 하여 마태오 복음 23장 22절을 봤더니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흠... 아마도 성서 표기도 제대로 못하는 것 보니, 김원율씨는 성서를 그리 공부하지도,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봅니다.

 

둘째, 김원율씨가 성서를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은 또 있습니다. 김원율씨가 인용한 성경 말씀은 마태오 복음 23,13 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비유의 시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은 하지 않는다. (마태 23,2-3). 이 말씀을 보면, 분명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다 실행하고 지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김원율씨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지금 교회의 성직자 (사제, 주교)로 해석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논리적인 모순이 발생합니다. 김원율씨가 말한 근거대로, 성경 말씀의 영원한 현시성과 적용성에 의하면, 사제나 주교의 개인적인 잘못이나 결함이 있다하더라고, 그 사제나 주교가 전하는 말씀을 따라야 하는데... 그러면 교회의 사제들과 주교들의 행실이나 잘못이 있어도 그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한다는 논리적인 결과가 생깁니다. 그런데 김원율씨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사제들과 주교들을 비판하는 논리적인 근거로 삼고 있죠. 이렇게 보면 한가지 아주 명확한 논리적인 결과가 도출됩니다. 김원율씨는 성서를 전혀 모르고 있다.

 

셋째, 마태오 복음 뿐만 아니라 복음서 안에서 자주 등장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들이 지금 우리식으로 따지만 사제와 주교들인가? 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분명 복음서에 보면, 대사제, 사제 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그럼 바리사이, 율법학자 = 사제 또는 대사제 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건지요?

흠... 이 문제는 좀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시대 이전에, Flavius Josephus 라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었는데요, 이 사람이 유다 전쟁사라는 책과 유다 고대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예수님 시대 뿐만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증언들을 해주고 있어서, 현대 성서학 연구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요세푸스는 당시에 있었던 종교적인 그룹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는 세 개의 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인간사에 관하여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 그룹은 바리사이파, 두번째는 사두가이파, 마지막은 에세네파이다. (유다 고대사 13:171)

 

곧, 이들은 사제나 대사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는 율법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같은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사제나 대사제, 지금으로 따지면 신부나 주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것은 논리적인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있게 해석해냈던 평신도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빗대에 사제들과 주교들을 비판하였던 김원율씨의 논리는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교회는 사제들과 주교들 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 모두(평신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에 참여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사제들과 주교들, 그리고 평신도들은 말씀의 직무 (예언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준에 빗대어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사제, 주교, 평신도 모두를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사제와 주교들만 지칭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서를 완전히 모르는 아주 무식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적인 근거로 봤을 때, 김원율씨는 성서를 아주 모르는 무식한 발상을 하고 있다는 논리적인 귀결에 다다릅니다.

 

넷째, 김원율씨는 사제들과 주교들을 비판하기 위하여 또하나의 성서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김원율씨에 의하면 에제키엘 34장에 나오는 너희는 아픈 양을 고쳐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에제키엘 34장 4절의 말씀인데요, 여기에 나오는 목자들을 김원율씨는 현제의 사제들과 주교들을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제키엘이 왜 목자들에 대한 예언을 통해 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제키엘이 쓰여졌을 때의 시기는 대략 기원전 605년 경으로 이때 이스라엘의 상태는 바빌론 유배 상태였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때,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 독립이 되던 말던 상관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갔던 사람, 그리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괴롭혔던 사람들... 예제키엘 예언서가 쓰여졌을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계명을 지키는 삶은 이미 멀어져갔고, 우상숭배에 빠져 살아가는 삶들이 태반이었죠. 그러면 여기서 에제키엘이 비판하고 있는 목자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성경구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너희는 아픈 양을 고쳐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목자가 양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관계에 대하여 에제키엘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목자들 중에 양들이 신음하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양들을 묵인해 버린다면, 에제키엘의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되겠죠.

 

양들의 인권이 짖눌려 아파한다면,

양들이 공권력에 의해 부러지고, 깨지고, 찢어졌다면,

양들이 신앙을 잃고 흩어져버렸다면,

목자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됍니다.

그 대상이 아무리 대단한 대상일지라도,

목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양들을 위해 가만히 있으면 안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구절을 통해 정의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사제들을 비판하기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말씀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며 많은 오해와 미움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논리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김원율씨는 성서를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 성서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 사제들과 주교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죠. 그리고 그 비판의 근거로 든 성경 구절 또한 김원율씨가 원하는 논리를 뒷받침 해주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사람들 모두를 의미합니다. 김원율씨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익과 욕심에 의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비판하고, 짖누르는 식으로 사용한다면, 바로 김원율씨 스스로가 당신이 인용한 말씀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사람들 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당신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당신 스스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고,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현혹하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제들을 욕하고 짖누르고 상처를 주고, 이런 당신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고 들어가려는 사람들 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죠.

 

아! 그리고, 성서를 인용해서 누군가를 비판하실 거면, 좀 더 성서를 잘 공부하시고 신중하게 인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꺼져가는 영혼에게, 절망 속에 놓여 있는 영혼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이 글을 통해 당신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한 사람이고,

당신의 신앙 안에 얼마나 사랑이 없고, 얼마나 악이 가득한지,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큰 악으로 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신자들에게 교회를 떠나게 선동하고 있는지를 잘 느끼길 바랍니다.

 

하루 빨리 회개하시고, 소속 된 본당에 가셔서 가슴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깊은 반성으로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고해성사를 하고, 교회를 죽이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살리는 자로 다시 태어나길 바랍니다.

 


입력날짜 : 2016-09-12 (17:58), 조회수 :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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