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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연민과 절망에 빠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뱉어내는 ‘불쌍한 영혼’의 절규
김원율 안드레아 (송파동)
 

 

박주환 미카엘 신부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너무 장황하여 종잡을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의 지도부를 반 가톨릭적이며 또한 ‘불쌍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필자는 자기연민과 절망에 지친, 진정으로 ‘불쌍한 영혼’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자기연민과 절망이 겉으로 표출될 때 이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그가 내뱉는 거친 언어 ‘사탄의 아가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미친 소리’, ‘가증스럽고 신성모독적인 미친 망발’은 바로 분노한 한 영혼, 박주환 신부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신학대학에 가는 친구를 축하하면서 해준 말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나 자네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겠다는 확신이 없다면 어쩌면 불행해질 수도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 안에서 어떤 확신도 없으며 이제 세속의 행복도 찾지 못하여 방황하며 분노하는, 어느 ’불쌍한 영혼’에게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박신부는 스스로 나는 이제 ‘잃을 것 없는 사람’이라고 자백하였습니다. 그가 만약 스스로 읊었듯이 “성삼위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에 ....(중략) 자신을 맡기며 살아가는 ’영적인 감수성‘에서 오는 기쁨, 사랑, 평화를 진정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제라면 도저히 이런 분노에 가득 찬 독설을 쏟아낼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하느님과의 친교에서도 실패하였고 세속의 기쁨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절망 그 자체이며 이로 인한 자기연민과 회한에 젖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파트너로서의 영적 감수성과 지복직관의 환희는 아득한 먼 나라의 일이며 세속에서 평신도가 누리는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도 갖지 못한 데에서 오는 후회와 자기 비관으로 인하여 갈 데까지 간 ’불쌍한 영혼‘의 망가진 모습을 평신도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대수천 지도부를 자유의지로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갖다 바치고 5천명의 선량한 대수천 회원들에게까지 영신적 해악을 자행하고 있다고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 이는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속담이 정확하게 적용되는 케이스입니다. 강론대에서 끝없이 분노와 저주를 퍼부으며 대수천의 비난을 받는 신부들의 모습이 바로 영혼을 사탄에게 갖다 바친 것으로 의심되지 않습니까? 많은 평신도들이 이러한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에게 ‘제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십시오’라고 영적인 청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평신도들의 청원을 정치사제들이 무시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대수천 지도부가 그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청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 신부는 후안무치하게도 자신들의 반 교회적인 행동은 안중에 없이 이러한 영적 청원을 사탄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신부들이 반 교회적, 반 성서적 행동을 멈추면 대수천도 신부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고 많은 중립적인 신부들을 자신의 이념 서클 안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습니다. 같은 교구의 다른 신부들에게 성명서를 이메일로 보내고 ‘답변이 없으면 모두 이에 서명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라는 비상식적인 멘트를 전하면서 전체 사제의 45%가 성명에 찬성한다는 등의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것이 바로 정구사입니다. 5천명의 대수천 회원들에게 영적인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하셨는데 대수천 회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대수천 지도부가 이들을 영신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면 이들이 무엇 때문에 대수천에 가입했겠습니까?

 

대수천의 상대주의를 비난하고 있는데 교회에 관한 어떤 글이 상대주의를 옹호하는지 예를 들어 보십시오. 이승만 박사에 대한 필자의 글을 장황하게 예시하면서 악의에 찬 공격을 하고 있는 데 필자는 이승만 박사의 과오를 덮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교회의 진리를 논하는 글이 아닙니다. 다만 이승만 박사의 과오도 질책할 것은 질책해야겠지만 그분의 공도 같이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재임기간 내내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와 싸우면서 현대 세계에서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절대적 우선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황께서는 하느님 없이는 인간은 본래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잃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필자는 성체의 교리를 그 예로 들었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이해하기 쉽고 단순한 것을 추종한 나머지 성체의 교리를 목적변화 내지는 의미변화 등으로 왜곡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6세는 1965년 회칙 <신앙의 신비>를 발표하여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인 ‘실체변화’를 재확인하였습니다. 동 회칙 17항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며 우리의 감각이 체험할 수 없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상대주의를 배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박신부는 근거도 없이 상대주의를 계속 들먹이면서 필자를 공격하고 있지만 필자는 세속주의에 빠진 사제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였을지언정 상대주의를 따라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박신부는 주교만이 교도권으로 성경에 대한 해석권을 가지는데 평신도인 필자가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구상유취(口尙乳臭)의 논리입니다. 참고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가톨릭 신학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신학자는 교회를 항하여 새로운 주장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이는 단지 교회를 향한 하나의 제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자신의 의견과 교회와의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면 재검토는 신학자의 몫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평신도 역시 이러한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평신도는 성경에서 자신이 느낀 점을 신학적인 관점에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교회의 관점에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평신도 역시 이를 재검토하여 오류가 있다면 수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박신부처럼 돼 먹지 않은 정치논리에 빠져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는 최소한 범하지 않았음을 자각하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자주 예거되어 이제 거론하기조차 지겹지만 강론대에서 4대강 반대,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주장하며 김현희를 군사정부 정보기관의 하수인으로 조작하는 것 등이 교회의 신앙과 윤리문제와 직결된다고 박신부는 생각하십니까?

 

박신부에게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김찬수 알렉산델 대표께 대하여 구마신부란 필명으로 댓글 단 것을 보면 박신부께서 얼마나 가정교육이 덜 된 사람인가 여실히 나타납니다. 이미 김찬수 대표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관습적으로 나이 어린 상대에 대하여 평어(平語)를 쓴 것입니다. 평어는 반말이 아닙니다. 김찬수 대표의 나이가 76세이며 박신부의 나이는 37세인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김대표의 막내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리므로 ‘하게’라고 하는 것이 사실상 ‘경어’에 해당합니다. 이 역시 상대를 배려한 말씨입니다. 과거 우리 나라의 사회관습은 자식 벌 되는 사람에게 평어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자기 자식에게 ‘하셨습니까?’ 라고 말합니까? 그리고 우리말에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을 평어(平語)라고 하지 반말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신부에게 한 말씀 드립니다. 이것이 진정 사제의 글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저주와 분노로 점철된 허접한 글 쓴다고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진정 나 자신 사제로서의 생활에 반성할 점은 없는 가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증오심에 찬 막가파 식의 글을 쓴다고 하여 자신의 마음이 후련해진다고 생각하신다면 아직도 박신부는 성삼위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에서 오는 ‘사랑, 기쁨, 평화’와는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완덕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토마스 키팅 신부의 저서 ‘내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을 보면 마태오 복음 6장의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 존재의 영적인 곳,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내밀한 공간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감수성’안에서 성령의 열매인 기쁨, 사랑, 평화를 갖는 길일 것입니다.


입력날짜 : 2016-09-01 (09:47), 조회수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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