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시편 22장 2절)
이 기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의 표현이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체험의 정점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수많은 패러독스를 믿음의 신비 속에서 체험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홀로였으나 하느님 아버지와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그는 파멸의 순간에 하느님의 구원의 음성을 들었다. 절망의 순간에 그는 희망을 보았다. 비참하게 무너진 수치스러움 속에서 그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루었다. 죽음의 순간에 그는 영원한 생명을 보았다. 완전한 비움 속에서 모든 것이 채워졌다. 어둠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가져다 주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십자가의 모순은 십자가 상, 고통스러운 하느님의 부재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 모든 역설의 해답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었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영광 속에서 부와 명예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곳은 부서지고 울부짖는 순간이다. 온종일 불러 봐도 하느님이 대답하지 않으시며 밤새도록 외쳐도 하느님이 모른 척 하는 순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과의 친교는 인간의 친교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하느님은 이미 오셨으나 아직 오시지 않았다. 하느님은 고통스런 ‘비어있음’ 속에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그 순간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음, 하느님의 부재로 우리가 체험한다.
많은 성인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하느님의 부재 속에 체험하였다. 이를 일컬어 ‘영혼의 밤’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성인도 일생 동안 단 한번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지 않았던 성인은 없었다. 곧 시성되는 콜카타의 복자 마더 테레사도 진정 하느님이 이 세상에 계십니까? 하고 부르짖었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애타게 찾았지만 하느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절망 속에 계셨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수많은 미성취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부재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부재 안에서 드러났다. 완전한 절망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삶,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의 희망을 떠올린다. 계시지 않는 하느님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히브리 서 11장 1절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실체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입니다’라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하느님은 비록 보이지 않으나 믿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십자가의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절한 십자가상의 고통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얼마나 절실하게 전해주셨는지 우리는 측량하기 어렵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걷지 않으면 나의 뒤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위대한 가르침인가? 십자가상의 어려움, 고난, 고통을 없이하고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삶을 살려는 사람, 자신의 인기만을 좇는 삶, 남의 인정과 명예를 따르는 삶을 산다면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부재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우리는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하느님을 찾는 기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낀다.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를 잃고 이천 년을 방황하면서도 하느님을 애타게 찾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참을성이 없는가?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다. 그분은 부재와 현존,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 떠남과 돌아옴 이 모든 구분을 초월하신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이 모든 구분을 건너뛰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 속에 생명이 있으며 절망 속에서 인간은 구원을 보았다. 어둠 속에 빛이 있었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밑바닥에서 더 없이 고귀한 천상의 영광이 자리하였다.
이 모든 초월, 건너뜀의 정점에 무엇이 있었던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자리하였다. 인간이 어떠한 희망도 없이 세상을 살았을 때 예수님은 바로 부활의 희망을 우리에게 전하셨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한 것은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을 때,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을 때, 죽은 이들 가운데 일어서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코린토 1서 15장)
지금도 십자가의 구원의 뜻을 교인들에게 전하기보다는 이 세상의 구원이 전부인양 교인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이단이 우리 주위에 상존하고 있다. 십자가의 패러독스, 하느님의 부재 속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이 있음을 우리는 믿는다. 십자가의 고난을 건너뛰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믿음을 가진 이들은 이 세상의 구원만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부활의 희망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