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오 복음 1, 23)
성탄절이 포함된 대림 제4주일을 교회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연말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한해를 보내며 사람들과의 친교를 확인하기 위하여 분주히 만남과 모임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만날 사람이 없이 외롭게 지낸다는 것은 자신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신세로 전락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많은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얼마나 바쁜가를 자랑삼아 말하며 어떤 이들은 하루에 두, 세 개씩 모임에 참석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만큼은 이러한 세태의 흘러감 속에서 한걸음 떨어져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많이 알고 많은 초대에 응하고 많은 사람과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이 사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고 영향력 있는 인물임을 대외에 과시하게 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는 그리스도인이 믿고 따르는 임마누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과의 유대를 확인하고 SNS 상에서 대화하고 또 만남을 가집니다. 자신이 누군가의 손을 잡고 그와의 유대 속에 있음으로 해서 자신도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세속의 여러 부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고독감과 소외감이라는 비참한 감정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세상의 권세와 소속감에 목을 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옆에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 말할 수 없이 외로움과 고독감, 비참함을 느낍니다.
성경의 한 구절을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올바른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은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상급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골방에 가서 남이 안보는 곳에서 홀로 드리는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왜냐 하면 진정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내가 혼자 있는 장소, 고독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명성, 하느님께서도 자신들을 알아주신다고 하는 교만함, 길거리에서 인사받기 등에 집착하는 속물들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천대받는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골방이라 말씀하신 곳은 오늘날 옥상에 지어진 옥탑방 같은 곳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서민이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옥탑방 같은 곳에서 홀로 하느님께 기도할 때 진정 임마누엘,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곳에 계십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 주변에 벌떼처럼 모인 사람들이 호텔에서 벌이는 호화스러운 파티, 박수치고 서로의 유대와 지지를 맹세하는 정치모임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는 시청 앞 광장에서 공공연히 정부타도를 선동하는 시국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기도는 절대로 남을 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기예수님은 정부를 타도하자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시국미사에도 절대 오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판관이 되어 남을 심판합니다. 그러나 진정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은 그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대신한다고 소리높이 외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하느님의 정의를 실행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 스스로 하느님 자리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말하고 스스로 판관이 되어 남을 단죄하고 스스로 예언자가 되어 세상이 파멸하리라고 떠벌이는데 불과합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시기심과 증오심을 이용하여 편 가르기를 하고 부자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며 분란과 불화를 조장하고 선량한 양들을 교회로부터 흩어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있을 때 하느님은 바로 그 자리에 계십니다. 임마누엘 그 이름이 뜻하듯 우리가 성탄절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내 마음의 구유를 비워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는 순간까지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나의 가치, 나의 판단, 나의 생각을 멈추고 침묵을 지킬 때 비로소 우리는 내 마음에 구세주의 강생을 맞이할 준비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곳에서는 주님의 생각, 주님의 가치가 아니라 나의 생각, 나의 판단만이 넘칩니다. 최근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관련하여 정의평화위원회 주교님께서 성명서를 발표하셨습니다. 그러나 정평위의 주교는 그 내용이 하느님의 가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가치로 판단한 것인지 먼저 묵상해야 했습니다.
교회가 어떤 의견을 낼 때에는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한다는 생각으로 태산이 움직이듯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주교님이 세상의 잡사에 관여하여 이런 저런 말씀을 자주 하시는 것은 신자들에게 무관심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송구한 표현이지만 주교님께서 발표하시는 성명이 일반 신자들에게 옆집 아저씨가 말씀하시는 것만큼의 느낌이나 인상도 주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간,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정 내 마음 속에 하느님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내 마음속의 구유를 말끔히 비우고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였는지 묵상해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