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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의 사회교리학교를 고발한다
김원율 안드레아 (송파동 성당)
 

부산교구에서는 얼마전 4월 15일부터 6월 17까지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최로 가톨릭 센터에서 사회교리학교를 개최하였다. 교리학교 제1강의 ‘사회교리란 무엇인가?’에서 부산교구 정평위 부위원장인 이영훈 신부는 복음화란 사회구조의 복음화를 포함하며, 인간이 피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피조물인 사회구조가 쇄신, 개혁되지 않고서는 인간의 구원도 이루어 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사회구조의 개혁이 종국에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사회교리 학교는 노동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정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법정의, 경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등 9개 강좌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 한국사회의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을 주제로 한 편파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예컨대 ‘한국 사회 노동문제의 불편한 진실’ (강사 : 하종강 성공회 대학교 노동 아카데미 주임교수)에서 보면 종교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개인구원론’에서 벗어나서 종교인들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는 데 앞장서서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사회구원’에 나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불의한 세력은 김정은이 지배하는 북한이 아니라,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그들이 말하는 ‘기득권 세력’을 뜻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탁월해지고자 하는 노력으로 사회의 상층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그들은 하나의 사회악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들은 시장경제체제의 사유재산제도가 지니는 가난이라는 문제를 인간의 내면에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는 영혼의 가르침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해방이라는 key word로 해결하고자 한다. 부산교구 정평위원장인 이동화 신부는 사회교리학교의 강좌에서 성경이 본질적으로 히브리인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의 노예 해방전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수천년 동안 기독교가 노예의 종교였다는 입장과 이를 애써 무시하는 입장으로 나뉘어져 왔다고 강변한다. 이동화 신부는 한국 사회가 정치적인 독재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지금이 재벌 독재의 시대이며, 이는 그가 주장하듯이 성경의 역사가 노예의 역사였다고 하는 일방적인 성경해석에 근거한다. (이동화 신부: “새로운 독재”와 한국천주교회의 응답) 그래서 이들 사회교리론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노동자, 농민들이 피지배계급으로서 노예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엇이 이들이 주장하는 해방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뚜렷해진다. 아마도 노동자 ‧ 농민, 피지배계급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그들이 말하는 해방일 것이다. 이들은 인간내면의 순화와 사랑은 종교적인 지상과제가 아니며 종교가 인간내면에 하느님 사랑을 심는데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구조의 불의함을 해소하고 밖으로 나와서 정치적인 투쟁에 몰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에 사랑이 없다면 이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그들이 행하는 해방의 작업은 결국 어디로 귀결될 것인가? 내면이 선해지지 않는 한 무산계급이 세상의 주인이 된다 하여도 가혹한 징벌과 처단, 기득권자에 대한 재산몰수 등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내면의 정화는 필요없으며 종교도 사회적인 구원에 나서야 한다는 이들 주장 속의 구원은 결국 폭력과 유혈혁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성경이 기록하는 노예의 역사, 히브리인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은 오늘날 신앙인의 관점에서는 무엇을 뜻할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앙인들이 죄와 탐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동화 신부같은 분은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이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굳게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제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할 필요도 없고 또 한편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세상을 하직하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부산교구의 정의평화위원장이라는 분이 통진당 해산이 헌법의 민주적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사회교리로 포장하여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저의가 무엇일까? 신자들은 내면의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교회에 가는 것이지 통진당 해산이 민주적으로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 이런 잡동사니를 배우고자 교회에 가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사회교리의 정신을 그대로 신자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입맛에 맞게 조작된 내용을 사회교리의 핵심정신인 것처럼 신자들을 오도(誤導)하고 있다. 당시 세상을 휩쓸었던 사회주의에 대하여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셨던 레오 13세 교황님의 회칙 ‘새로운 사태’와 그 후에 이어진 ‘40주년’은 가난한 자의 질투심을 이용하여 사유재산제도를 없애고자 하는 공산주의를 인간의 골수에 침범하여 인간성을 말살하는 치명적 전염병으로 규정하였고 계급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사회적 가르침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또한 1988년에 로마 교황청 가톨릭교육성이 제정한 ‘사제 양성에 있어서 교회 사회교리의 연구와 교육에 관한 지침’의 52항 ‘지역교회의 사회적 과제’에서도 지역교회의 특수성을 인정하지만 교회가 속한 지역의 사회, 정치, 문화적 실상을 올바로 평가하고 보편교회에 타당한 사회적 가르침이란 원천에서 판단원리와 기준을 이끌어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보편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한 사회교리란 존재의 가치가 없으며 사회교리라고 해서 보편성에 어긋난 어떠한 주장을 해도 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보편성과 영성의 가르침을 무시해서는 사회교리라고 해서 평신도에게 납득되고 어필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지역교회의 특수성을 감안하여야 함도 보편적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 교황청에서 1980년 암살당한 엘살바도르 천주교회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절차를 진행한다고 해서 교회내의 반국가 세력과 정치사제들이 한껏 들떠 있는 듯이 보이나 한마디로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이다. 고문과 처형이 일상화되었던 7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상황을 어찌 지금의 한국교회와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평신도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부산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를 위시하여 최근 한국 천주교회의 급진적인 사제들은 지나치게 사회교리에 집착하며 사회교리가 교회의 대세라고 강변한다. 이 근저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다. 신부들의 지나친 정치 참여와 선동적인 반정부 강론에 평신도들의 반발이 거제지자 어떻게든 이를 성경과 교리, 신학에 연결시켜 자신들의 주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신자들을 납득시켜 자신들의 반정부적, 혁명론적 해방신학에 신자들을 supporters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노림수가 있는 것이다. 과거 80년대 대학에서는 신입생을 상대로 운동권 선배들이 의식화 교육을 시켰다. 오늘날 486정치인들의 타협을 모르는 강경하며 극렬한 투쟁심은 그때의 의식화 교육에서 배태되었음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친노후보가 18대 대선에서 패하자 국정원 일부 직원들의 댓글 백여편을 명분삼아 전국을 돌면서 대통령 퇴진시국미사를 봉헌하는 반국가적이며 반교회적인 짓거리를 행하다가 교회 평신도들의 엄청난 반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정치사제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반정부활동을 접는 대신, 이제는 과거 80년대 식 의식화 교육으로 신자들을 자신들의 혁명사업에 홍위병으로 끌어들이고자 온갖 궤변과 선동적인 내용을 '교회의 사회적인 가르침'(Social teachings of the church)으로 포장하여 평신도들을 현혹하고 있다. 참으로 집요하고 끈질긴 반국가 세력이다.

 

사제들은 실상 수도자와는 달리 청빈의 의무를 강요받지 않는다. 그들도 어느 정도는 현시대의 경제과실을 향유하고 있음은 자신들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명대사의 출가의 원인이 된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불가의 승려들이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출가생활을 하는지 설명하는 예를 볼 수 있다. 출가 전 젊은 시절 사명대사가 산길을 걷고 있으니 한 스님이 헐레벌떡 내려와서 계곡 물에서 겨우 배추 한 잎사귀를 건져 올라가는데 사명대사가 따라 가니 이미 상당한 길을 내려 왔었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그 스님에게 ‘겨우 배추 한 잎사귀를 건지려고 이 먼 길을 내려오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스님이 한심한 눈초리로 사명대사를 바라보며 ‘사부대중의 시주로 살아가는 중놈이 어찌 배추 한 잎인들 허투루 내버릴 수 있단 말이냐?’고 일갈하였다. 사명대사는 이에 크게 깨닫고 출가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제들은 사실 세상에서 평신도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어려움, 절망 속에서 얼마나 고난을 겪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생활에 지친 평신도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야 할 것이다. 허파에 바람만 가득하여 자신들이 구세주가 되고 예언자의 직분을 행한다면서 나라를 파멸로 이끈다는 것은 굶어죽을 걱정 없이 ‘사부대중의 시주’로 먹고사는 성직자가 행할 바는 아닐 것이다.

 

사회교리를 성경과 성전(聖傳)에 앞서 교회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교회의 대세로 삼을 수는 없다. 레위기에서 가르치는 이웃사랑과 하느님 사랑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사회교리의 정신을 100퍼센트 실행할 수 있다. 그리고 정의평화위원회의 신부들이 가르치는 사회교리의 내용은 로마 교황청에서 역대 교황님들이 여러 회칙을 제정하고 가르쳤던 내용이 아니라 자신들이 임의로 꾸민 다분히 반국가적인 내용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언 속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처절한 노력도 없이 입으로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사제들을 보면 이들이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진정한 행복인지 가난한 사람들의 적개심을 부추겨서 해방과 혁명을 이루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이들은 눈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나 종국에는 국가를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는 것들을 경제정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저임금 대폭인상, 복지확대 등으로 경제가 파탄난 지금의 그리스를 본다면 한국도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에 대하여 문외한인 이들 정치사제들처럼 재벌독재와 민중경제를 들먹이면서 포퓰리즘에 휘둘리는 경제를 정의로운 경제라고 생각하고 이를 따른다면 결국 한국도 그리스처럼 되고 말 것이다. 이들은 진정으로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배아픈 사람들을 다독이는 폭력적이고 사회변혁적인 내용을 교회의 사회적인 가르침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들이 제아무리 그럴듯한 변설과 감언이설로 타인들을 현혹하더라도 이런 거짓주장에 넘어갈 신자들 수는 많지 않다.

 

이미 많은 경제학자들이나 사회 정치논자들은 이 나라에서 사회적인 갈등이 증폭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이러한 진보의 탈을 쓴 선동꾼들 때문이라는 것을 뼈속깊이 인식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일제에서 벗어나 독립하였을 때 얼마 안되는 공업시설과 발전설비마저도 대부분 북한에 남겨졌고, 남은 시설마저도 625전쟁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시피 하였다. 남한의 경제상태는 세계의 최빈국 수준이었으며 한국의 일인당 GNP는 아프리카의 가나의 수준에 미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박정희 군사정권의 관료, 국민의 일체화되고 총체적인 경제개발드라이브가 오늘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언제나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고 무언가 사람들이 감탄하는 것에 대하여 이를 냉소적으로 보고 깔아뭉개려는 심보만이 가득한 인간들은 이 모든 분투와 노력을 개발독재, 인간의 소외, 노동자 착취 등으로 몰아가며 선배세대들의 노력을 폄하하고 있다. 한국이 얼마 안되는 자본주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나마 이제 겨우 밥먹고 살게 되었지만 아직 자본축적은 얼마 되지 않는데 그마저도 복지타령으로 모두 털어먹게 생겼다. 4-50년 힘들게 경제를 쌓아올렸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10만 평방킬로의 좁은 국토에 70%가 산지이고 나머지 30%의 좁은 땅에서 5천만의 인구가 집짓고 농사짓고 공장 짓고 도로건설하며 복닥거리고 살아가는 나라가 한국이다.

 

국가의 부(富)에는 일정기간의 수입에 해당하는 유량(流量, Flow)으로서의 연간생산량이 있고 자본주의의 역사기간 중 쌓아올린 존재량(存在量, Stock)으로서의 국부(國富)가 있다. 우리나라는 Flow로서의 국가의 부는 상당 수준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하여 쌓아놓은 국부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자원이 거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구 몇백만에 엄청난 석유자원을 가진 나라도 아니며 이탈리아처럼 막대한 관광자원이 있는 나라도 아니다. 그러니 사람들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달프고 경쟁도 치열하며 젊은 세대는 직장, 결혼, 출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포자기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너무나 고달프고 미래는 더욱 암담하다. 정치인은 자신의 인기를 희생할 것인가, 나라가 망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라고 물었을 때, 백이면 백이 나라는 망하더라도 자신이 인기를 얻는 쪽을 택하고 있다. 정치인에게 양심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이럴 때 마지막으로 사회의 양심적인 보루가 되어야 할 사람들은 그나마 종교인일 것이다. 그런데 종교인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사회의 갈등을 부추기고 정부 사업에 사사건건 결사반대하며 북한정권의 개가 되어 나라를 파멸에 빠트리려고 한다면 결국 이 나라가 갈 길은 40년 전의 월남 이외에는 길이 없을 것이다. 성직자가 신도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신 세속의 잡다한 번민이나 가져오는 강론을 하면서 신자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면 그 강론은 개가 짖는 소리하고 다를 것이 무어가 있겠는가?

 


입력날짜 : 2015-07-11 (17:45), 조회수 :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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