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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사제들의 해군기지반대의 반교회성
김원율 안드레아 (송파동 성당)
  

1. 제주 해군기지건설과 성서의 가르침


마태오 복음 26장  52절


4월 6일자 제주교구 주보의 글에서 현문권 신부님은 ‘제주 교구장님과 정의평화위원회는 강정 해군기지 문제에 대하여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 역대 교황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의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제주 교구장과 정의평회위원장, 두 분 주교님께서 그동안 천주교회 내에서 사회적인 이슈에 어떤 입장을 보여 왔는가를 인지한다면 이 분들이 어떤 시각에서 해군기지에 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하였을 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이에 대해 먼저 성서의 가르침을 보겠습니다. 마태오 복음 26장 52절에서 보면 예수님은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에게 상처를 입힌 제자에게 이르십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의 사용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칼로서 공격하는 자에게 맞서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칼의 사용마저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총이 칼을 대신합니다. 나라를 지키는데 총을 사용하지 말라는 교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군대갔던 친척 형이 휴가 와서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부대에 신병이 한사람 들어왔는데 보초를 서러 나가는 데 몽둥이를 들고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합니다. 상관이 타이르고 두들겨 패기까지 하였지만 이 신병은 끝까지 보초를 서러 나가는데 집총을 거부하였습니다. 이 신병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의 교리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국가가 있어 전쟁을 하게 된다면 전투에서 군대가 전멸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나 군대가 전쟁에서 전멸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국민은 적국의 노예가 되어 압제의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의 필요성은 명백해 집니다.


‘환경탈레반’ 식의 논리가 정의구현사제단의 교리인가요?


천주교 사제들이 자신들만의 편향된 교리를 앞세워 정치 사회 이슈에 개입하여 국책사업을 방해하는 가장 현저한 예가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과 4대강 사업, 밀양의 송전탑 건설입니다.


막중한 국가 안보에 관련된 해군기지 건설에 대하여 독선과 아집에 빠진 천주교의 성직자들이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라도 해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가진 환경 탈레반 식의 논리대로 한다면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의 국책사업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실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정부가 행하는 거의 모든 국책사업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있습니다. 단지 반대의 의사표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와 수녀들이 현장에서 물리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주민들을 선동하고 갈등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구럼비 바위가 희귀한 자연유산입니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국가수호를 위해 긴요한 해군기지를 7년간에 걸쳐 집요하게 방해해 왔습니다. 이들은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구럼비 바위라는 것을 들고 나와 이 바위가 희귀한 자연유산이라고 강변하면서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분이 작년에 제주도 해안을 자동차로 돌았는데 이 구럼비 바위란 것은 제주도 해안에 수천 개가 있는 현무암 바위의 하나였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왜 분리되어야 하는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왜 필요한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무오류성을 전제로 하는 종교가 정치, 사회문제에 개입하여 자신의 주장에 집착하게 되면 타협의 여지를 없애고 한없는 분란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봅시다. 천주교회 4대 교리 중의 하나인 ‘천주존재’는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로서 신자들이 믿을 의무를 지님과 동시에 무오류성을 지닙니다. 만약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나 오류의 여지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종교로서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통계를 보면 현대에 약 40%에 달하는 무신론자가 있으며 이들에 대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강제적으로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라 함은 믿을 자유 이전에 믿지 않을 자유가 전제됩니다. 가톨릭 교리서 160항은 ‘신앙이 인간적인 응답이 되려면 인간이 하느님을 자유로이 믿고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억지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법전 748조 2항 역시 ‘아무도 사람들에게 그들의 양심을 거슬러 강제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고 규정합니다.


대한민국의 공동체는 무신론자, 불교도, 천주교도, 타 종교의 신자를 포함한 모두의 공동체입니다. 해군기지 건설에 대하여는 국민 사이에서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지만, 이제는 나라의 안전과 해양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국민 상호간에 그 필요성이 합의되어 건설공사가 60% 이상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내의 일부 주교와 사제가 해군기지 건설이 ‘교회와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강제적으로 중지시킬 어떠한 합리적인 논리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천주교회의 사회적 교리, 그것도 일부의 주교와 신부들만이 주장하는 교리를 국가의 안보에 적용한다는 것은 집총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를 군대에 적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가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이 된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수 있음과 같이 모든 국책사업이 천주교 사제들의 편향된 교리 때문에 중단된다면 결국 이 나라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2. 해군기지 건설과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15항과 2310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15항은 ‘군비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킨다. 과잉 군비는 분쟁의 원인을 증가시키고, 분쟁이 확산될 위험을 증대시킨다.’ 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과잉군비가 전쟁의 위험을 증대시킨다고 했지만 한국의 해군력은 불행히도 주변국 중 가장 뒤떨어진 대만의 해군력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해군기지 건설은 군비경쟁과 무관하며 나라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지 남의 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해군력으로서는 북한의 잠수함공격으로부터 해군 함대의 안전을 지키기에도 바쁩니다. 탈북자 중 김동식 씨라는 분이 있는데 이 사람이 전에 간첩으로 두 차례나 남파되었습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제주도 해안이 남파간첩 침투루트로 가장 적합하며 자신도 두 차례 모두 제주도 해안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한이 한 순간도 한반도 적화야욕을 버린 적이 없는데 두 번째 남침에서는 남단의 섬 제주도를 먼저 점령하고 이를 전초기지로 하여 남한을 적화한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한의 종북세력이 그토록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해군기지 반대세력이 천금같이 떠받드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평화의 보호’라는 항목 중에서 2310항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항에서 교리서는 ‘국가는 국민에게 국가방위에 필요한 의무를 부과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군인의 임무를 행하는 것은 참으로 국가의 공동선과 평화유지에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강우일 주교님께 한 가지 여쭈어 보고자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엄연히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공동선과 평화유지에 유익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우일 주교님은 이러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셨습니까? 지금도 전방에서는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불철주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며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주교님은 성직자로서 교리의 가르침을 따르기 이전에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병역의무를 궐한 것에 대하여 내면으로 부끄러워하며 후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북세력의 나팔수가 되어 나라의 안보를 위해 국민 간에 합의되어 진행되고 있는 해군기지를 반대하면서 갈등과 분란을 초래하고 있음에 대하여 참회하셔야 합니다. 주교님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면서 가톨릭 교회교리서를 들추고 있으나 주교님이 바로 교회의 교리서를 정면에서 위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서 23장에서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바리사이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은 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바라사이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정의라는 말을 외치며 갈등을 부추기며,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미움을 조장하는 종교 세력이 바로 이 시대의 바리사이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의 행복선언(마태오 복음 5장)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불행선언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23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들은 겉은 아름답게 보이나 속은 회칠한 무덤처럼 죽은 이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 이들은 겉은 의인처럼 보이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입만 열면 인간의 존엄성, 공동선을 말하고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는 예언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무리들이 누구인지 대한민국의 천주교 평신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제는 미사의 도구입니다


몇 년전 어느 신부님이 성사에 관하여 강연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론 중 신부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은총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사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성사에 있어 사제는 하느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시면서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때를 벗기는 것이 목욕이라고 한다면 성사에서 우리는 영혼의 정화를 경험합니다. ‘이때 영혼의 때를 벗기기 위하여 목욕탕처럼 때밀이가 때밀이 수건을 가지고 때를 민다면 신부는 이 중 무엇에 해당될까요?’ 하고 신부님이 강론 중 질문하셨습니다. 신자들이 ‘때밀이요’ 하고 대답하자 신부님은 ‘아닙니다. 신부는 그냥 때밀이 수건에 불과합니다.’고 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제는 미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미사의 도구입니다. 신자들이 사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제는 자신의 관심이나 성향을 드러내기 위하여 미사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미사는 그 특성 상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소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원 집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제는 미사를 드림에 있어 자신의 사적인 의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사랑의 성사’ 46항에는 다음과 같이 미사 강론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강론은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끔 도움으로써 그들의 삶에서 열매를 맺게끔 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제들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충실이 준비하여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참으로 교회의 활력과 버팀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최근 천주교회 내에 많은 갈등과 분열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신부들이 자신이 미사성제의 도구임을 잊고 스스로 미사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데 그 연유가 있습니다. 이른바 ‘시국미사’라는 것이 그러한 갈등의 연원입니다.

밀양에서,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국책사업을 반대하면서 끝없이 분탕질을 치는 신부님께 말씀드립니다. 진정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제라면, 정신이 올바르고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사제라면 이른바 ‘시국미사’라고 하는 곳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백보를 양보하여 신부님들의 주장이 사회의 일부계층을 돕고자 하는 뜻이 있다하더라도 자신이 미사의 주인공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신 신부님들의 편견과 아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로 미사성제를 이용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입니다.



3. 해군기지 건설과 역대 교황님의 가르침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에서 ‘현대의 경향’ 126항과 127항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126. 인간은 민족들 간의 논쟁이 무기 경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협상을 통해서 해결된다고 믿는다.

127. 이러한 확신은 현대 무기의 엄청난 파괴력 때문이다. 원자력을 사용하는 현대에서 전쟁이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하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교황 회칙 ‘지상의 평화’의 가르침을 진실로 이해한다면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원자력을 사용하는 현대의 무기경쟁과 관계가 없음이 명백합니다. 북한의 핵무기 실험과 미사일 발사야말로 주변국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있으며 ‘지상의 평화’에서 경고하고 있는 무기경쟁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핵개발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나타내어야 할 사제단이 이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이토록 반대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회칙 ‘진리안의 사랑’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회칙 ‘진리 안의 사랑’ 46항에는 ‘인간은 정당한 욕구를 위하여 환경을 책임감있게 사용할 수 있다. 자연자체를 손댈 수 없는 우상으로 보거나 함부로 파괴하는 두가지 태도 모두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과 맞지 않다. ······자연을 인간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는 것은 진정한 발전에 위배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자연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생각하여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해쳐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도 아닐 뿐더러 역대 교황님의 어느 가르침에도 이런 내용은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거짓 예언자들의 허상-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In Hope we were saved)는 다음과 같이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곧 희망이며 이는 기도 안에서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셨습니다. 또한 바라빠나 바르 코크바처럼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담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최고의 주님이신 하느님과의 만남, 그래서 삶과 세상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킨 희망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사제들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메시아주의에 빠져 과격한 정치적인 발언과 세속의 정치에의 관여가 예언자의 직무인 것처럼 신자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비 메시아주의라는 우상을 붙들고 있는 오도된 사제들의 허상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칭하지 않으셨습니다.


1월 15일 정진석 추기경께서는 한 일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사제들이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고 있으며 만약 이들이 예언자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사심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지금 우리 사회에 논란과 분열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들 거짓 예언자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4년 1월 강우일 주교님은 경향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사제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 짓밟히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지녀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이 정의롭게 발전해나가도록 지켜보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는 이를 고발하고 비판과 저항도 불사하는 것이 예언자의 직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강우일 주교님은 2012년 성탄절 메시지에서 ‘똑똑한 사람과 가방끈이 짧은 사람, 능력있는 사람과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빨리 달리는 사람과 천천히 밖에 달릴 수 없는 사람’으로 세상을 2분법으로 나누었습니다. 또한  가진 자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서 마치 주인처럼 월권을 행사하고 형제의 것을 탈취하면서 독점하며 지내왔습니다.’고 비난하셨습니다. 고대의 유다 왕국에서 과부와 고아가 착취당하고 버림받으며 예언자의 분노를 산 것처럼 주교님은  가난한 사람이 가진 자의 횡포에 고통 받는 현세의 불의에 분노하는 예언자처럼 행세하셨습니다.


강우일 주교님, 당신의 예언자적 사명은 무엇입니까?


강우일 주교님께서 그토록 부르짖었던 세상의 정의와 평화는 결국 친북세력이 정권을 잡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주교님께서 선거후 강정마을에서 열린 성탄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강론하심으로써 여실히 드러내셨습니다.


“대선 이후 지금 이 나라에는 1,469만 명의 국민들이 비슷한 집단 우울증을, 영혼의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예수님,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고 따르는 한 우리는 절망의 덧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강우일 주교님은 국민이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을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집착이요 망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교님에게는 자신의 그릇된 논리, 사사로운 편견이 곧 정의요, 하느님의 말씀이며 친북 정권의 수립이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 84항

    -무익한 비관주의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 84항에서 다음과 같이 요한23세 성인께서 1962년 10월 11일 말씀하신 내용을 인용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따금, 종교적 열정으로 불타지만 올바른 판단력과 식별이 없는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그들은 파멸과 불행만을 볼 뿐입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온 것처럼 대재앙만을 예견하는 불길한 운명의 예언자들과 우리가 결코 뜻을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교회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바로 무익한 비관주의에 빠져있는 군상입니다. 이들이야 말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복음의 기쁨’의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합니다. 교황님의 권고 ‘복음의 기쁨’의 핵심적인 정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음 선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 93항

    - ‘영적세속성은 안 된다 (No to spiritual worldliness)’-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의 영적 세속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영적세속성은 신앙심의 외양 뒤에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 한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이는(영적 세속성) 모두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 교묘한 방법입니다. ······영적인 세속성이 교회에 스며들면 단순히 도덕에 관련된 다른 모든 세속성보다 교회에는 더욱 엄청난 재앙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 49항, 183항


교황님께서 이처럼 영적 세속성에 대하여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강정마을에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교황님이 세속적인 정치참여를 옹호하시는 듯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 붙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쓰느라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원합니다.” (복음의 기쁨 49항)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됩니다.” (복음의 기쁨 183항)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183항 중 중요부분을 다시 첨가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는 국가사회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하지 말라고 그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콜카타의 데레사 복자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도록 이를 성당 안에 가두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기준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복음의 기쁨’에서 교황님은 폐쇄적으로 교회의 안락함과 청결함에만 머물기 보다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콜카타의 데레사 복자처럼 비록 상처받고 더러워지더라도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하는 빈한한 삶을 택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정의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정의’를 말씀하신 것이지 길거리에서 ‘시국미사’를 드리는 정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의 권고 어디에도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반복음적인 투쟁을 정당화하는 조항은 없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반복음적 투쟁의 예


- 2012년 3월 예수회의 김정욱 신부가 구럼비 발파작업을 방해하기 위하여 담을 뚫고 공사장에 진입하였다가 재물손괴혐의로 구속된 바 있습니다.


- 2012년 3월 수원교구 조영준 신부가 제주도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로 묘사한 만화를 배포하였다가 이에 항의한 중학생을 폭행하여 부모로부터 고소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 정의구현사제단은 용산화재 참사, 쌍용차 종업원해고, 한진중공업 사태,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한미 FTA반대 등 분쟁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달려가서 갈등을 확대하고 분란을 조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새만금 사업, 4대강 사업, 해군기지 건설 등 거의 모든 국책사업에 극력 반대하였습니다.


- 정의구현사제단은 2009년 2월 2일 용산참사 희생자 추모미사를 하면서 ‘재앙과 파국의 대한민국’이라는 비관적이고 종말론적인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선언문에서 전종훈 신부는 이명박 대통령을 ‘교만과 탐욕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통치자’로 지칭하였고, 선언문은 한마디로 저주와 막말로 점철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금년 3월 24일 풍남문 광장에서 시국미사를 한답시고 박창신 신부는 해외순방중인 대통령에게 ‘화장실에 갔다가 밑도 닦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다.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시정잡배도 입에 올리기 어려운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사제입니다.


사람의 가슴이 사랑으로 가득 차면 그 사랑이 넘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며 이러한 사랑이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짐으로써 이 사회가 바뀔 것이며 마침내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이상적인 세계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며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성직자의 사명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결실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온유함, 절제, 성실, 인내, 친절과 선의가 있는 곳, 이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느리지만 서서히 이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가는 것, 이것이 성령께서 일하심이요 이런 일들이 성직자로서 사제에게 맡겨진 직분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명이 감질나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더욱 급진적이며 직접적으로 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시는 사제가 있다면 그런 분은 로만 칼라를 걸치고 교회 내에 머무를 필요가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이 세상이 종종 지옥에 빠지는 것은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겠다고 날뛰는 인간들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제주 해군기지와 같은 거대담론에 파묻혀 날밤을 지새지만 정작 탈북 동포들이 북한으로 송환되어 죽음의 길을 걷는데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4. 맺는 말 : 평화는 끝없는 인내와 희생의 결실입니다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져 순식간에 도시는 지옥이 되었습니다. 단 하나의 원자탄으로 인하여 우라카미 성당과 그 주변에서 8천명의 신자들을 포함하여 3만명 이상의 시민이 희생되었습니다. 당시 나가사키 대학병원의 방사능 과장이었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사랑하는 아내, 수십년간 피땀흘린 연구의 결실이 집약된 자료, 얼마 안되는 재산마저 잿더미가 되는 참혹한 현실을 눈앞에서 겪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분노할 수 있었고 처참한 현실에 대하여 저주의 말을 쏟아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이 박사는 오랜 성찰 끝에 연민과 생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몸소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연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며 고통받 는 사람을 위로할 없습니다. 울어보지 않고는 남의 눈물을 닦아줄 없으며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서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길을 찾는 것을 도와줄 없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엄습해오는 죽음의 입김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있다는 기쁨을 만끽할 있도록 도와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생명의 귀중함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도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속에서 중국 대륙을 헤매고 있는 탈북자에게 생명은 그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천신만고의 불행과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참된 평화의 가치를 알 수 있겠습니까?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만난의 여정을 헤쳐 왔던 우리의 선조에게 평화란 얼마나 귀중한 가치였을까요? 


나가이 다까시박사는 문제의 핵심은 알지 못하면서 슬로건 따위를 소리로 외치는 경박한 사람들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보통사람들이 열망하는 평화를 이용하는 정치가들이나 종교인들을 통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실질적인 사회정의, 사랑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힘든 일에 헌신하지 않으면서 오직 정치적인 목적에 치우친 평화운동은 오히려 세상을 더욱 어렵게 따름입니다.


평화란 한없는 인내, 헌신, 희생의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만 얻을 있는 고상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평화의 섬'을 외치며 정부와 대립하는 천주교 신부들이 얼마나 희생하며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과연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고찰하였고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100년 전 우리는 왜 나라를 잃었습니까? 당시 우리나라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실질적인 힘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 상황에서 대한민국만이 평화를 외친다고 해서 동북아의 다른 나라들이 같이 평화를 외쳐줄까요? 중국은 항공모함을 건조하였으며 일본은 집단적인 자위권을 갖고자 하며 자위대가 아닌 국방군을 갖겠다고 합니까?


평화운동은 평화로운 마음의 소유자들에 의하여 이루어 질 때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있습니다. 아집과 독선, 분노와 증오에 빠진 사람들이 외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를 외치는 성난 사람들의 함성 뒤에는, 종종 평화와는 상관없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알지 못하면서 제주도에서 해군기지반대에 종사하는 사제들을 보면 인간의 경박함에 대한 연민을 떨쳐버릴 없습니다. 평화란 가장 고귀한 가치이며 또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평화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배세대들이 오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6.25전란 중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오늘의 번영을 이루기 위하여 앞선 세대의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습니까? 과연 지금 젊은 세대들이 그들이 치른 희생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평화!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 "너희들에게 평화를"이었습니다. '평화의 섬'이라는 슬로건이나 외치면서 야외미사를 올리는 얼빠진 사제들에 의하여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평화를 남기고 떠나신 예수님과 영혼으로 일치 하고자 하는 내면의 치열한 노력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찮은 이데올로기에 빠져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의 섬 지키기' 운운하는 구호나 외친다고 평화가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평화스러워야 합니다. 참되고 실질적인 사회정의, 사랑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힘든 희생에는 전혀 헌신하지 않으면서 그냥 사회적인 명성, 세속적인 명예욕에만 미쳐 날뛰는 인간들에 의하여서는 평화가 이루어질 없습니다.


아집과 독선에 빠져 끝없이 해군기지를 반대하고 있는 강우일 주교님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께 마지막으로 간청합니다. 진정 평화를 원하신다면 분란을 일으키는 모든 행동을 멈추시고 그냥 침묵 속에 계십시오. 흙탕물이 맑아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만히 기다리면서 진흙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서에도, 교회의 가르침에도, 교황님의 가르침에도 없는 해군기지 반대를 위한 생명 ‧ 평화 미사를 멈추시고 성전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가르침과 교황님의 가르침, 바로 ‘사랑’을 온몸을 바쳐 실천하는 진정한 목자로 거듭 태어나십시오.



입력날짜 : 2014-07-23 (20:51), 조회수 :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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