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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권력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십시오
김원율 안드레아 (송파동 본당)
 교황성하의 우상에 대한 경고
 
 브라질을 방문 중인 프란치스코 1세 교황성하께서는 7월 24일 상 파울로의 한 성당에서 행하신 강론에서 ‘돈과 권력, 세속적 성공등 우상의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교황성하께서는 이날 강론에서 "오늘날 청년들을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이 돈과 권력의 우상에 매혹돼 있다"며 "가슴 속에 움트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이런 우상을 통해 한순간의 만족을 얻게 되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유다백성들은 환성을 지르며 그 분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닥쳐올 파멸을 예고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진정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이세상에서 그들에게 돈과 권력을 가져오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너희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라고 말씀하시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였던 바로 그 백성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예루살렘은 망하였고 유다인들은 나라없는 백성이 되여 2천년을 떠돌아다니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속의 부와 영광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예수님을 환영하다가 돌변하는 예루살렘 백성처럼 세상의 모든 가치, 재물과 권력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들이 종국에는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파멸에 이르게 될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하루는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이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한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이군요.” 한 천사가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하느님의 위대한 창조물인 인간을 어리석다고 하십니까?” 첫 번째 천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인간이 어리석은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인간은 자신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죽을 때 아무 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자 합니다. 세번째로 그들은 백년을 살지 못하면서 천년, 만년을 살 것 처럼 생각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7월 1일자 신문에는 교황님께서 교회 지도자들이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데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고 나옵니다. 교회 지도자들마져 인간세계의 허무한 가치에 빠져 권위와 잘못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음에 대하여 경고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하느님의 사랑
 
 지난 주 7월 18일자 성경말씀에 보면 하느님은 모세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물음에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다 (I am who I am)”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이 말씀에는 참으로 심오한 뜻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즉 자신의 정체(正體)에서 벗어난 그 무엇도 아닌 바로 하느님 자신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할 때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그 무엇’ 즉 재물이 있고 학력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Who are you?)’라는 물음에 하느님께서 “나는 바로 나 자신이다” (I am who I am)라고 대답하신 뜻은 바로 우리가 ‘다른 그 무엇’이 아닌 우리 자신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대중에게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설법을 남기셨습니다. ‘자신의 본성을 보면 부처가 된다’ 는 뜻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부처인데 인간이 무지∙무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부질없는 집착으로 인해 고통 속에 있음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은 부와 권력을 버리고 출가하여 6년의 수행끝에 인간의 본성을 보셨으며 무지와 무명으로 인해 인간이 고통 속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욕심,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부질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고통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끝없이 돌고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내가 아닌 ‘그 무엇’이 되기 위하여 무자비하게 경쟁하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못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이야 말로 진정한 내 모습을 보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본성을 보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망을 내려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참으로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로 인하여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이 되기 위하여 무지와 무명속에서 헤아나지 못하고 고통속에 살고 있습니다.
 
 교황성하께서는 가슴속에 있는 공허감을 달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돈과 권력, 일시적인 쾌락에 빠져 있으나 이러한 우상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가까이 가는 길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20세기의 고백록이라고 일컬어지는 “칠층산”이라는 책을 쓴 토마스 머튼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도 좋다. 심지어는 잡놈이 되어도 좋다. 그러나 단 한가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이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을 배반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머튼의 말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세상의 세속적 성공을 위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잊고 무자비하게 경쟁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중국 속담에 “인박출명 저박장”(人拍出名 猪拍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사람은 이름이 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살찐 돼지가 가장 먼저 잡아먹히고 인간의 명성이 높아지면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에게 명예가 덧없으며 어느 순간에는 그에게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명성에 목을 매면서 나를 알아달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방법으로 가진 자들을 공격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평지풍파를 일으키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언자이며 정의를 구현하는 투사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말썽이 있는 곳에 감초처럼 나타나서 사회의 불안을 조장하는 망나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러면서 자신들이 인정받지 못하면 더욱 실망하고 도전적이 되어 더욱 필사적으로 분란을 일으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인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부질없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신부님,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편가르기의 본성’에서 벗어나십시오
 
 최근 NLL등의 이슈를 둘러싸고 우리 나라의 정치판이 시끄럽습니다. 그 분란의 중심에는 바로 친노 정치세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작년에 총선과 대선 실패 이후 2선으로 물러나 있던 친노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한 친노 의원의 ‘귀태’(鬼胎: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 발언, 역시 친노의원인 상임고문의 막말 파문 등 정치판이 강경파의 투쟁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부산출신의 야당 국회의원마저도 ‘강경파가 득세하면 나라가 망한다’ 고 친노세력을 겨냥하여 성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 친노가 등장하면 이 나라의 정치판은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는지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이들은 정치적 지향점으로 오로지 투쟁과 선동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소외된 ‘99%의 사람들’을 위한 민생은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친노 세력들의 정치적 본성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본성은 1%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불만을 부추기는 선동, 이를 위한 편가르기(1% 대 99%),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본성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편가르기와 적개심, 분노가 이들의 정치적 본성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야당후보가 건국대통령과 산업화를 이끈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정치세력의 정치적 동력이 오로지 편가르기와 적개심, 분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친노를 대표하는 후보가 개인적으로 이 분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싶어도 그들 지지세력들의 분노와 적개심이 무서워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 전대통령은 반드시 이들 세력과 같은 뜻을 가진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합리적인 의지를 보인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락 전쟁 당시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한미FTA를 시작하였으며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말라고 자신의 유서에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 천주교 내에서도 이들 친노세력을 지지하며 이들과 같은 길을 가는 사제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 신부님들은 마음 속에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는 대신 오로지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닐지요?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가슴에 품고 어떻게 강론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들 신부님들이 정작 버리지 못하는 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편가르기 의식입니다. 편가르기에는 2분법과 증오심만이 자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할 여지는 그만큼 좁아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사제들이 이른바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그럴듯한 이름하에서 ‘김현희는 가짜다’ 라는 기자회견을 하고 추기경님에 대한 집단 항명을 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고도 반성이 없이 지금도 로만 칼러의 권위 뒤에 숨어서 세속의 권력을 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가르기 본성이 내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사제들이 세속적 권위라는 우상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내 안의 본성을 잊고 세속의 정치에 개입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유와 인권이 흘러넘치는 자유 대한민국을 갖은 구실로 공격하고 분쟁을 일으키면서도 정작 지구상에서 가장 처참한 처지에 있는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침묵하며 외면하고 있습니다.
 
 작년 대선을 앞두고 이들 천주교 내의 친노세력들의 노력은 한마디로 눈물겨울(?) 정도였습니다. 제가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2012년 10, 11월 대선특별호 68호’라는 명제의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정의 평화’지를 보면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습니다. 제가 동지에 실린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장동훈 빈첸시오 신부의 글을 일부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통이 범람하여 들판과 도성, 골목 어귀까지 차 올랐다. 엔간한 곡소리에는 이미 내성이 생긴 불감증의 시대, 돈이 기어코 신의 자리까지 찬탈해버린 약육강식의 야만의 시대, 이 끝자락에서 세상을 살릴 방도는 무엇일까?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해야 할 시기이다. ∙∙∙∙∙∙ 우리는 선택의 시간을 맞았다. 누가 목소리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누가 힘없는 자들의 편을 들어줄 것인가? 누가 이 야만의 시대를 끊고 사람의 시대를 열어 줄 수 있을까?”
 
 또한 동 지의 2면과 3면을 보면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질의에 따른 대선후보 정책평가’라는 란을 통하여 사형제도, 국가보안법, 4대강 사업, 핵발전소, 한미FTA,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의 이슈에 관하여 정의평화위원회의 입장을 대비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투표방향을 암묵적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12월 9일 정의평화위원회의 인권주일 담화문에서의 노골적인 선거개입 등 참으로 천주교 내의 친노세력들의 선거개입은 도를 지나쳤습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얼굴 두꺼운 선거개입을 행하면서까지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친노 후보는 고배를 마셨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은 우리 편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어떤 장교에게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이 전쟁이 진정 하느님의 정의와 부합될 수 있는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사하고 하느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는 노예해방이라는 고귀한 명분에서 전쟁을 시작하였음에도 이처럼 겸손하였습니다.
 
 우리 평신도들은 자신들만의 정의에 빠진, 자신들만이 정의롭고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는 믿음을 가졌다는 오만한 사제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고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의 실패는 한마디로 국민을 자신들이 계도해야 할 대상으로 본 오만하고 편견에 가득 찬 천주교 내의 일부 사제들의 어리석음이 초래한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차라리 이처럼 어리석은 이들 사제들이 침묵을 지켰더라면 야당 후보가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열왕기에는 북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하여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예로보암의 길을 걸었다는 표현이 10여차례 나옵니다. 북이스라엘을 세웠던 예로보암은 하느님의 길을 걷지 않고 우상숭배의 길을 걸었습니다. 교황성하께서는 권력과 돈이라는 우상을 멀리하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아마 후세에 한국교회를 서술하는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할 것입니다. “이들 천주교 내의 일부 사제들은 하느님의 길을 걷는 대신 세속의 권세를 꿈꾸며 친노의 길을 걸었다. 신자들은 강론대를 어지럽히는 이러한 정치 지향의 사제들의 강론을 들으며 분개하면서 교회를 떠나갔다.”
 
입력날짜 : 2013-07-28 (15:27), 조회수 :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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