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전 서울 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께서는 2012년 부활절 메시지에서 일부 사제의 도를 넘은 정치행위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의 심각한 분열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특정 정당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거부하는 일은 삼가야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특히 강우일 주교가 천주교 주교회의의 이름으로 4대강 살리기 반대를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만장일치를 의제의 결의요건으로 하는 교회법에 어긋나는 일부 주교에 의한 채택이었습니다. 또한 일부 신부들이 사회어젠다에 대하여 특정 정치세력을 대변하는 발언으로 강론대를 어지럽혀 신자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이에 실망한 신자들이 심지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마저 발생하는 것을 추기경께서는 우려하셨습니다.
특히 일부 사제들은 정치적인 언행을 삼가해달라는 신자들의 예의를 갖춘 진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강생이 곧 사회의 불의를 해소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였지 사회체제의 구조악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회 정의를 구현하시고자 하셨다면 로마의 압제 밑에서 동족을 착취하였던 세리들을 가장 먼저 벌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로마인들을 유다에서 내치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당시 죄인으로 여겨졌던 세리와 창녀를 가까이 하셨고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셨던 그룹의 인간들은 바로 자신들만이 정의롭고 자신들만이 구원받으리라고 생각하였던 아집과 교만에 가득 찼던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만약 사회정의와 평화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사제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 평화를 거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민감한 시점에서12월 9일 주일미사 주보에 끼여져 나온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명의 인권주일담화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환경과 생태계, 인간생명, 정의와 평화를 위협하는 4대강 개발, 핵에너지 확산정책,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허위사실입니다.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4대강 개발, 핵에너지 확산정책,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결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주교회의에서 모든 주교가 찬성하지 않고서는 천주교의 공식의견으로 채택되지 않습니다. 정의평화위원회 이용훈 주교의 담화문은 명백하게 교회법 455조 4항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심각한 사실은 서울교구의 거의 모든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가 이 인권주일 담화문을 신자들에게 읽어주고 있는데 이 담화문이 도대체 누구의 재가를 받고 서울대교구 신자들에게 배포되고 미사시간에 강론대신 신자들에게 낭독되고 전달되고 있습니까? 만약 이 행동이 주교회의 내의 일부 급진적인 사고를 가진 주교의 임의대로 행해진 것이라면 이는 천주교회 내의 위계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입니다.
더하여서 저는 유아세례를 받고 65세가 되는 지금까지 성당을 다니고 있습니다만, 선거를 눈앞에 두고 특정정파의 주장에 노골적으로 동조하는 교회 인쇄물이 거룩한 미사시간에 이처럼 배포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일부 교우들에 의하면 천주교회 내에서 북한을 왕래하면서 북의 주장에 동조하는 주교와 사제들이 있다는 탄식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12월 9일자 또 한가지 주보의 간지에는 서울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명으로 “제2회 사회교리 주간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싣고 있습니다.
“특히 4대강 개발과 핵발전소 관련정책에 대해 매우 강력하고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실천을 위해서도 우리 교회는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비롯한 군비증강이 결코 평화의 길이 아니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역시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제주기지 건설을 반대한 적이 없으므로 교회가 해군기지건설이 평화의 길이 아니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허위입니다. 언필칭 정의 평화위원회라고 하면서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그 들이 주장하는 정의와 평화는 누구를 위한 정의와 평화입니까?
정의는 누가 판단합니까?
정의에 대하여 성경적 의미를 따른다면 하느님을 믿고 따름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그 의로움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의는 인간의 아집과 독선을 배격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자신만이 옳다는 교만한 인간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며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였던 성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옳고 그름은 오로지 하느님이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4대강, 원자력, 해군기지 건설에 관하여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찬성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이에 반대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며 공동선, 사회정의라고 정의평화위원회는 주장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가르침은 지고지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겠지요? 물론 우리는 이러한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기도하고 애씁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 일상의 삶에서 이를 그대로 따르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복음은 “예수 믿어 구원받으세요.”가 아니라 “여기 밥이 있다.” 입니다.
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마이클 노박은 “공산주의는 성인들을 위한 제도요, 자본주의는 죄인들을 위한 제도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성인들은 적지만 죄인들은 많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 “40주년” “100주년”은 일관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였으며 또한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회칙 “새로운 사태”를 읽으면 가난한 사람에 대한 부의 재분배는 국가가 개입하기보다 개인의 선의에 의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추억
어렸을 때 가난했던 사람들이 가난의 뼈저린 슬픔과 상처를 극복하고 이를 상생과 화합으로 승화시켜 후에 자신의 재물과 사랑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것을 우리는 훈훈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가난했을 때 상처받고 괄시받은 아픔을 그대로 품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래서 가진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창의와 열정, 근면 성실로 부를 이룬 사람들까지 싸잡아 “기득권 세력”으로 매도합니다. 이들은 강정마을, 용산참사현장, 4대강 등에서 정부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현장에서는 언제나 선동과 저주의 말을 뱉어냅니다. 이들에게 가장 우상이 되고 있는 사제는 제주도 강정마을, 평택 미군기지 현장 등에서 극렬투쟁에 앞장서는 나이든 사제 M신부입니다. 이들에게는 한풀이 정치, 배고픈 사람보다 배아픈 사람을 위한 정치를 행하였던 참여정부시절이 가장 그리운 시절일 것입니다. 사제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하느님을 향한 지복직관의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기도와 관상이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이들 사제에겐 오로지 불만세력들을 부추기고 선동하는 투쟁만이 자신들의 본업이요, 바로 이것이 자신들의 정의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한 친구가 자신이 최근 세례를 받았으며 천주교가 좋은 가르침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친구들에게도 입교를 권했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가 “그런데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건 뭐하는 사람들이야?”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세례받은 친구 답변이 “아, 그 사람들은 천주교에서도 이미 내놓은 사람들이니 신경쓸 것 없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2003년 참여정부 시절 이른바 예언자적 사명을 행한다고 하면서 “김현희는 가짜”라고 기자회견을 하였던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한갖 사회를 바꾼다고 하면서 메시아적 망상에 빠져 있지만 교회의 평신도들은 이들을 선교의 암적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0년 4대강 사업에 대한 추기경의 의견을 문제삼아 추기경의 용퇴를 주장한 하극상을 연출하였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자 이를 대신하여 전면에 등장한 것이 바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라는 조직입니다.
평화는 험난한 과정이다.
나가이 다까시박사는 나가사키의 성자로 불리워진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중 원자탄 피폭으로 아내와 건강, 재산, 수십년간의 피땀어린 연구자료 등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분노할 수도 있었고 저주의 말을 내뱉을 수도 있었지만 용서와 화해, 진정한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에 대한 진지한 성찰 끝에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몸소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연민이 어떤 것인지 알지못하며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할 수 없다. 울어보지 않고는 남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서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길을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없다. 시시각각으로 엄습해오는 죽음의 입김을 느껴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있다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없다.”
나가이박사는 문제의 핵심은 알지 못하면서 슬로건 따위나 외치면서 큰 소리나 외치는 경박한 사람들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보통사람들이 열망하는 평화를 이용하는 정치가들이나 종교인들을 통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평화란 한없는 인내, 헌신, 희생의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고상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평화의 섬’을 외치며 정부와 대립하는 천주교 신부들이 얼마나 우리의 역사에 대하여 성찰하였으며 얼마나 나라밖 정세를 알고 있을까요? 우리 일반시민들은 너무나 쉽게 기지건설에 반대하는 사제들과 정치인들이 무책임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습니다. 100년전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힘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만이 평화를 외친다고 해서 동북아의 다른 나라들이 같이 평화를 외쳐줄까요? 중국은 왜 항공모함을 건조하였으며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자위대가 아닌 국방군을 갖겠다고 합니까?
평화운동은 마음이 평화로운 소유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질때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아집과 독선, 분노와 증오에 빠진 사람들이 외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실질적인 사회정의, 사랑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힘든 일에 헌신하지 않으면서 오직 정치적인 목적에 치우친 평화운동은 오히려 더욱 세상을 어렵게 할 따름입니다. 평화를 외치는 성난 사람들의 함성 뒤에는, 종종 평화와는 별 상관없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알지 못하면서 제주도에서 해군기지반대운동에 종사하는 사제들을 보면 인간의 경박함에 대한 연민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평화란 가장 고귀한 가치이며 또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의 선배세대들이 오늘의 번영을 이루기 위하여 6.25전란 중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오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앞선 세대의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였습니까? 과연 지금 젊은 세대들이 그들이 치른 희생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평화!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 “너희들에게 평화를”이었습니다. ‘평화의 섬’이라는 슬로건이나 외치면서 야외미사를 올리는 얼빠진 사제들에 의하여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평화를 남기고 떠나신 예수님과 영혼으로 일치하고자 하는 내면의 치열한 노력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찮은 이데올로기에 빠져 제주 강정마을에 내려가서 ‘평화의 섬 지키기’ 운운하는 구호나 외친다고 평화가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이 평화스러워야 합니다. 참되고 실질적인 사회정의, 사랑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힘든 희생에는 전혀 헌신하지 않으면서 그냥 사회적인 명성, 세속적인 명예욕에만 미쳐 날뛰는 인간들에 의하여서는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