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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복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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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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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김원율 안드레아 (송파동 본당)
 소설 “보이지 않는 손”(문학과 지성사)을 쓴 우리시대의 자유주의 논객 복거일 씨는 반자유주의 논리가 성행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 대하여 “자유주의를 기본원리로 삼은 사회에서 자유주의자가 망명객이 된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많은 경우 지식인들은 자본주의라는 용어대신 시장경제, 자유경제라는 말을 쓰기 좋아한다. 자본주의라는 말이 자본가에 의한 약자의 지배라는 다소 부정적인 함의를 지녔음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굳이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제목으로 택한 것은 이른바 지식인들이 갖는 진보성이 얼마나 위선이며 이들의 이론이 하늘의 뜻에 어긋남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기 위함이다. 필자는 이를 위하여 이 시대의 뛰어난 신학자이며 정치학자인 마이클 노박 (Michael Novak, 1933 ~ )과 교황청의 문헌을 중심으로 본문을 전개하고자 한다.
 
 한국경제를 이끌어 가야할 권부의 핵심인 청와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은 다음의 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무지를 넘어 우리에게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소수의 승자만 존재하고 다수의 패자는 존재할 수 없는 ‘카지노 경제’는 비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보다도 못합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밀림에서도 강자는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중략) 그러나 승자독식체제의 경제에서는 강자의 탐욕이 끝이 없습니다. 그들은 밀림의 제왕인 사자보다 백배, 천배 더 잔인합니다. 밀림에는 평화가 있지만, 카지노 경제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카지노 경제에서는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정한 사회입니다.”
 
 자유 시장경제에 대해 1%의 의식만 있는 사람이라도 이 글을 읽으면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20세기 초처럼 볼셰비키 혁명을 하자는 것인지 왜 이런 헛소리를 하는지 궁금하다.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양극화는 바로 현 정부의 자본주의에 대한 무지와 공격에서 시작되고 있다. 첫째, 이 정부는 우리사회가 밀림의 강자보다 100배, 1000배 잔인한 자본가의 탐욕에 의해 지배된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사유재산제도를 완전히 부정하고 가능하면 공산주의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정의라는 위험한 의도를 품고 있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말이며 교회가 말하는 창조주의 뜻에도 명백히 어긋나는 역천자(逆天者)의 논리이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평등을 주셨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는가? 왜 사자는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는가? 하느님은 왜 연약한 몸과 뛰어난 지성을 인간에게 주셨는가? 현 정부의 집권자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가?
 
 마이클 노박은 가톨릭교회가 자본주의 정신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891년 교황 레오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공표하면서부터라고 하였다. 레오 13세는 사유재산제도, 개인의 창의와 열정, 그리고 자연적 불평등(natural inequality)등을 부정한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사회주의의 파멸을 예언하였다. 이는 후일 교황요한 바오로 2세가 공표한 회칙 “백주년”에서 참으로 뛰어난 예지력을 가진 회칙으로 찬양되었다. 러시아가 사회주의화하기이전에 이미 질투심에 근거한 사회주의의 폐해를 예언하고 감성주의적인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의 사유재산부정을 신랄히 비판하였다는 것은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국가의 폭력을 이미 예견한 선지자(先知者)적인 판단이었다.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가 주장하는 사유재산제도의 내용
 
 성서는 목축시대를 배경으로 한 구약과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한 신약으로 나뉘어 진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사회발전에 대하여 교황청은 성서에 버금가는 해석과 교의(敎義)를 발표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리하여 공표된 것이 1891년 레오 13세에 의하여 제정, 공표된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회칙(回勅; 돌려보는 칙령이라는 뜻의 교황청 문헌중 최상위 개념)이었다. 새로운 사태가 주장하는 사유재산제도와 사회주의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아래의 설명과 같다. 본문은 새로운 사태의 원문에 근거하여 그 뜻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자 한다.
 
 최근 생산과 상업이 소수에 의해 독점 장악되고 무수한 노동자 대중들은 노예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멍에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러한 악의 치유를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부자들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서 사유재산을 없애야 하며 그대신 모든 이를 위한 공동재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가 행복해지는 결과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투자하며 자산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권리와 희망을 빼앗아 버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
 
 더 나쁜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해결책이 명백하게 정의에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유재산권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다. 사유재산권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 짓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짐승은 두 가지 본능 즉 개체보존의 본능과 종족보존의 본능에 의해 지배당하고 규제받는다. 또한 감각과 특수한 감수성을 가지고 움직이므로 자기주변의 테두리를 벗어나 멀리 보지 못한다. 맹수는 날카로운 발톱과 뛰어난 힘으로 자신보다 힘이 약한 동물을 먹이로 삼아 언제든 배를 채울 수 있고 포식하고 나면 사냥을 멈춘다. 맹수는 먹이의 저장기능을 갖추지 못하므로 배고프면 다시 힘이 약한 동물들의 사냥에 나서고 이는 맹수라는 종족의 수천 년 간 일관된 종족유지본능이요 생활습성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짐승과 근본적으로 구분되게 해주는 특권을 갖고 있으며 이는 지성이다. 인간은 지성을 가짐으로써 재화를 단순히 사용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이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이는 소유권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사용됨으로써 소모되는 일시적 사물들 뿐 아니라 사용하더라도 소모되지 않는 항구적 사물의 소유까지도 포함한다. 짐승은 그러므로 항구적사용에서 오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고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냥에 의하여 포식하고 배가 부르면 사냥을 중지하며 늙고 쇠약하여 사냥할 기운이 없어지면 젊은 개체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만다. 따라서 짐승들은 사유재산제도와 항구적인 재화의 사용권으로 복리와 안정을 추구해온 인간의 삶에 당연히 미치지 못하고 수천 년 간 동일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일시적 순간뿐 아니라 미래의 삶을 위해서도 스스로 적절한 방편을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인간은 땅을 소유하고 풍요로운 결실에 힘입어 미래에 대비한다. 인간의 욕구는 한번 충족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이 자신의 끝없는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였고 이는 토지의 사유에 의해서 충족되었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사유재산제도는 오늘날 인류의 삶을 어느 시대보다 풍요롭고 편리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반도체 산업의 되풀이되는 거대한 집적도의 향상은 달리는 차안에서나 휴대폰에서의 인터넷마저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런 변화는 미래의 발전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욕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또한 부의 집적이 없었다면 거대한 자본을 요하는 반도체 생산시설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무한한 발전을 가져온 자본주의의 선(善)기능이 이러함에도 청와대의 좌파 권력자들은 20 대 80의 논리를 들먹이며 80%의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선동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무능을 기득권자들의 탓으로 돌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좌절감을 상위 20%에게 향하게 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치졸한 사고를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가톨릭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The Catholic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노박의 초기의 저서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민주자본주의의 정신”(The Spirit of Democratic Capitalism)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 때 수정된 사회주의이론을 주장하였으나 후일 입장을 바꿔 시장경제를 지지하였다. 노박의 저서 “민주자본주의의 정신”의 집필목적은 자본주의가 기독교 정신과 일치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은 또한 “가톨릭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The Catholic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등을 포함한 여러 저서에서도 자본주의야 말로 조물주의 뜻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노박은 자본주의의 정신은 창조성, 발명, 발견, 협동심, 사회적 열정, 변화의 수용성, 적응력, 관용, 실천, 그리고 자발적 참여로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Adam Smith에 의해서 이미 주장된 자본주의와 동일한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회사를 비롯한 자발적 조직들을 생성하고 재화와 용역, 이익을 창출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 의해 자본주의는 정직, 근면, 생산성, 절약과 같은 선(virtue)을 함양하며 구성원의 사회적, 도덕적 생활을 풍요롭게 한다.
 
 또한 노박은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사적인 선(善)(personal virtue)으로 재 정의하였으며 이는 그의 중요한 업적이다. 과거 사회정의는 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예컨대 국가)에 의하여 실현된다고 믿었으나 노박은 이러한 사회정의는 선(virtue)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참여정부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기능을 늘여야 한다는 주장은 노박에 따르면 분명 오류이다. 교황 레오 13세가 공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에서도 분명 자선은 개인의 자각에 의해 행해져야 하며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부의 분배에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개인의 창의와 열정을 말살하고 결국 전체주의 국가형태를 초래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해하는 것이다. 과거에 분명 많은 지성인들이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특히 재분배(redistribution)와 관련하여 국가의 역할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소리 높게 외쳐 왔다. 이러한 사회정의는 하이에크 교수에 따르면 의존과 노예정신만을 함양하는, 전능한 국가(all powerful state)에 의해 강제로 시행되는 근거가 박약한 이상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하이에크교수는 이 세상이 종종 지옥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을 천국을 만들겠다고 날 뛰는 무리들 때문이라는 경구를 남겼다. 현 정부에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날 뛰는 무리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노박이 이야기하는 사회정의는 시스템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주의(Activism)를 뜻한다. 이는 국가의 기능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civil society) 즉 민간의 기능을 확대하는 것을 뜻한다. 노박이 말하는 사회정의는 국가가 아니라 자유스러운 공동체에서 개인의 지성과 연결되는 사회정의를 뜻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회주의는 인간의 권리, 개인의 독창성,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붕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교황에 따르면 인간은 조물주에 의하여 공동의 창조자(Co-creator)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이를 위해 인간은 자유를 필요로 하며 또한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바오로 2세는 국가는 과도하게 개입 (heavy dose of intervention)해서는 안 되며 개입이 필요한 경우라도 개입은 최소한이며 간결해야 한다(should be minimal and brief)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가는 재화의 집적과 균형된 성장, 완전고용, 취업의 증가, 정당한 임금, 사회부문이나 경제시스템이 지나치게 취약할 경우 보완기능의 행사 등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한 바오로2세는 종속이론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제3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결핍으로 그들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것이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기회가 충분하지 않다. 미국에서 평등이라 하면 곧 “기회의 평등”을 뜻한다.
 
 남미(Latin America)와 북미(Anglo America)가 비교적 비슷한 기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경제적 격차가 크게 나는 것은 남미의 경우 기독교 전래당시 기독교의 복음에서 사회주의적인 교리해석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자낙타론 이라든지 초기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인간의 자유보다는 평등위주의 기독교 정신을 그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미가 Marx적 평등사상과 기독교가 혼합된 해방신학에 의해 주도되는 것도 이러한 도입초기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전통적으로 앵글로 색슨(Anglo Saxon)족이 자유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 데 반하여 구대륙 남부의 라틴족 계통이 평등이라는 사상을 중시한 것도 남미에서 역으로 부의 불평등이 오히려 일반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마이클 노박의 동반자적 창조자론(Co-creator)
 
 인간은 하느님과 같이 세상의 창조 작업을 완성하기 위한 창조 작업의 동반자적 관계 즉 Co-creator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창의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이다. 인간은 창조되어서 날 때부터 그가 평생을 소비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이러한 창조능력이 발휘되는 공동체중 가장 전형적인 것이 바로 기업(enterprise)이다. 우리는 공동선(Common good)을 목표로 하여야 하나 이러한 공동선으로 나아가는 첫째 공동체가 바로 회사이며 이러한 회사를 위해 헌신하며 사회를 위하는 것이 바로 지역사회를 번영시키며 나아가서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번영시키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오늘 공동선을 부르짖는 운동권 출신의 현 정부의 실력자들은 이러한 공동선의 원리도 깨닫지 못한 채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인 기업을 때려잡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최근 일련의 상속세관련 시민단체의 대기업고발과 현대 자동차 사태를 보면 정의와 도덕을 추구한다는 이 정부의 한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회칙 “새로운 사태” (교황 레오 13세)는 인간이 후손에게 상속한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손을 낳고 번영하라는 조물주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이 나라의 고귀한 도덕논자들은 기업은 사회의 공기이며 이를 자식에게 상속하는 것은 정당성을 결여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평생을 피 땀 흘려 일군 기업을 후손에게 상속하는 것은 결코 조물주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왜냐하면 자식은 자신의 분신이며 상속을 부정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속세를 100%로 하면 바로 한 세대만 지나면 모든 사유재산은 국가의 소유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피 땀 흘려 기업을 일구겠는가? 인도의 무굴제국은 과도한 상속세로 인해 나라가 망하고 종국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출발선상에서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출발할 수 없다. 일본의 경제학자 다께우찌 야스오는 상속을 부정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질투심에 가득 찬 인간들이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물론이요, 스스로 보수라고 칭하는 지식인들마저 자신도 모르게 범하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하느님의 평등의 정신이 곧 정의이며 다만 인간의 탐욕과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현실세계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충분히 실현되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노력과 결실은 비례하는 것이며 수없는 땀과 눈물을 흘린 사람이 그 결실을 향유하는 것이 오히려 창조주의 정의에 가까울 것이다. 가톨릭은 부자나 기득권을 옹호하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Christianity)의 정신은 인간의 창조의 의욕을 북돋우고 개인의 열정과 기업의 성장이 공동선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따라서 돈을 버는 것, 기업이 이익을 향유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번 돈을 쓰는데 있어 하느님의 뜻을 따를 것을 권유한다. 이는 혼자 모든 것을 누리지 말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벌었더라도 자신보다 못한,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해 그 일부를 나누라는 것이다. 유대의 탈무드에서는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번 돈의 10분의 1을 남을 위해 사용할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다만 앞에서도 누차 주장한 바와 같이 정부의 개입은 자제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죄인을 위한 제도이며 사회주의는 성인을 위한 제도이다
 
 마이클 노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죄인(sinners)을 위한 제도이며 사회주의는 성인(saints)을 위한 제도이다.
 
 죄인은 많으나 성인은 매우 적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실패하며 자본주의는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예수는 스스로 나는 죄인을 위해 왔으며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스스로 의인이라 칭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독사의 족속이라 꾸짖었으며 세리나 창녀들이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 갈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 나라에도 자신들만이 의인이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청산의 대상이며 반성해야할 죄인이라고 주장하는 21세기 판 바리새인들이 있다. 386주사파들과 한국판 문화혁명이라 할 수 있는 개혁을 입에 담고 사는 시민단체 홍위병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오로지 남을 비판하고 이 사회를 주도하는 앞서 가는 사람들의 뒷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독사 같은 족속들이라는 사실을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이들은 전 세계가 찬탄하는 이 나라의 고도성장을 이끈 그간의 패러다임은 모두 버리고 주민을 300만 명이나 굶어죽게 했던 북한의 패러다임을 좇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자유, 대의정치, 미래지향, 점진적인 변화를 버리고 평등, 참여라는 이름의 대중인기 영합식 중우정치, 과거사청산이라는 과거지향, 인기한탕주의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이 나라는 성장동력을 잃고 몸살을 앓고 있으며 엄청난 수의 신용불량자, 청년실업, 중산층의 빈곤화로 나라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는 무엇이 하늘의 뜻인지 모르고 천둥벌거숭이마냥 날뛰는 현 정부의 깽판정치 때문이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나라가 어려운 것은 그들이 하늘의 뜻 바로 조물주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력날짜 : 2006-05-18 (10:44), 조회수 :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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