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翼하러 聖職의 假面 쓴 것인가?!
우연히 신문에서 아주 작은 칼럼을 하나 읽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의 수반을 맞았는데 그 때 있었던 일을 당시에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 회고하며 들려주었다는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었다.
<노무현이 새마을 노래를 부른 것은 ─>
대한민국보다 북한을 더 친하게 여기는 나라의 수반인 그 방문객은 開口一聲개구일성,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높이 평가하며 마치 그 선전을 대신 해주는 일을 사명으로 삼아 방문한 것 같은 인상을 보였다고 한다. 통역을 맡은 사람이 당황할 만큼 그것은 노골적이고 작심한 일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런 그의 말을 통역으로서는 있는 대로 전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있는 대로 옮긴 말을 듣고, 노 전 대통령은 매우 불편해 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던 노 전 대통령은, 아주 당당하게 반론을 폈던 모양이다. 인민을 아사의 지경에 빠뜨린 그런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일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서슴지 않았으며, 거기 비해 우리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경제정책의 성공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나를 역설했고 그 중에서도 새마을 운동의 의미를 열심히 강조했고 마침내는 「새마을 운동 노래」까지 힘차게 불렀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남북격차는 생길 수 밖에 없었고 우리의 경제 기적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이야기해서 상대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노무현觀관을 지녀온 나에게 이 칼럼은 다소 혼란을 주었다. 지난 5년 동안 보여온 노씨의 행적에 비추어 볼때 이건 좀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었던 것이다. 이 칼럼 하나 때문에 문득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처음으로 어떤 회의가 꿈틀거리며 고개를 드는 느낌까지 경험했다.
그러다가 매우 부자연스럽고 풀리지 않는 억측의 고리를 연결해가며 한 가지 미완의 지도를 그려보기에 이르렀다.
<「눈치 없는」 대권소유자 길들여 변형 시켰나>
모든 영예와 재화 그리고 가족에게 돌아갈 영화의 보장 같은 것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다급하게 뒷덜미를 나꿔채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며 환상의 탈출을 시도한 그 노무현의 생애가 어쩌면 그를 둘러쌌던 집요한 좌파 운동권들이 사주하고 재단한 결과로 그려진 지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출발한 발상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한 것은 검은 수단을 늘어뜨려 입고 이른바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직함을 전지전능한 권능처럼 휘두르며, 지난 세월을 온갖 방식으로 재단하던 한 신부의 「말씀」이 인터넷을 통해 우리 발 앞에 던져져 온 것을 대하고서였다.
그는, 박 정희를 향해 개인의 원한을 흉탄에 담아 살육의 제전을 벌였던 김재규를 안중근 열사와 같은 반열에 놓고 「김재규 장군 29주기 추모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를 서두로 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 자살 소식을 접한 바로 그 날이 김재규의 29주기였고 이 의식에 참석한 사람은 불교 개신교를 대표하는 적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
이 성직자는 「노무현 시대」의 막후에서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종교인이다.
비록 외교관계를 맺어야 할 「손님」이지만 그가 독재 세습의 김일성부자를 칭송하는 부당함에는 참을 수 없어 주먹을 흔들어 박자를 맞춰가며 새마을 노래를 부르고 박정희 시대가 이룬 민족의 성취를 예찬한 당선 초기의 노무현을 보고 이 성직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주역을 맡아 왔음을 시시때때로 강조하며 이 「눈치 없는」 대권소유자를 길들이기 위해 그들은 아주 특별한 노력을 했을지도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의 5년 임기는 이렇게 변형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투신자살했다.
이 성직자의 「말씀」에는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평가하거나 칭송하는 말 같은 것은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노씨가 남긴 유언을 『절제된 언어의 아름다운 詩시구절이었다』고 칭송했고 이 아름다운 유언을 장례식 내내 기도하며 그 「깊은 뜻」을 묵상했다고 말하고 있다.
<성직자의 옷 갖춰 입고 犯法을 정당화하고 자살을 美化ÅÅÅ>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유언에는 별 것이 없다. 그것을 신부는 철학적 사고의 깊은 경지로 풀고 너무너무 아름다운 시라고 말하고 있다.
노무현은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다. 특히 서민을 섬기며 어렵고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 편임을 임기 내내 역설하고 강조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나라에 대해서도 그 국민에 대해서도 하다 못해 자기편이라고 편갈라 믿게 했던 사람에게조차도 단 한마디의 인사도 사과도 배려도 하지 않았다. 그 유언이 이 성직자에게는 왜 그렇게 아름답고 깊은 뜻을 지닌 묵상의 화두였을까.
「유언의 아름다움」을 최고의 찬사로 예찬한 다음 이 성직자는 전직 대통령의 투신 자살 자체를 같은 수준의 찬사로 의미 부여하며 찬탄한다.
그 자살은 『모욕과 배신 , 실망과 좌절, 고통과 절망을 넘어선 의지적 결단. 그리고 현실과 내세, 인생과 종교를 압축한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이고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의 자세에서, 아니, 그 스스로 하늘의 명령을 오히려 앞당기며 삶과 죽음을 넘어 초탈의 경지에서 결단 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성직자가 속한 카톨릭에서는 자살은 커다란 죄를 짓는 일로 일컬어진다. 그 교리를 아주 「아름답게」뛰어넘는 논리를 그는 구사하고 있다. 그 논리의 결론이 흥미롭다.
이 「뜻밖의 사건」―노무현 전대통령의 투신자살―을 통해 역사의 새로운 물줄기가 펼쳐지는데 그것은 하늘의 섭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그들의 의도이고 또한 그들이 거두려는 수확인 것 같다. 이 성직자는 이 수확을 거두기 위해 성경도 인용하고 「하늘」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선배 대통령 박정희를 예찬하고 싶어한 노무현의 생각과 그 박정희를 향해 증오의 흉탄을 던진 김재규를 열사로 추모하는 성직자의 생각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벼랑에 몰려 죽음 앞에 임한 장본인과 그 죽음을 통해 정치적 의도와 수확을 계산한 성직자의 생각 사이의 괴리 또한 아주 깊은 것으로 보인다.
성직자의 옷을 갖춰 입고 장엄한 의식을 벌여가며 범법을 정당화하고 자살을 미화하며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논지로 정리해준 「뜻밖의 사건」의 명분을, 야당과 무언가 북쪽의 협박에 발목이 잡힌 듯 한 또 다른 전직 대통령, 빼앗겨버린 지난 10년의 영화가 그리운 사람들이 대동단결하여 머리에 이고 한바탕 전투를 벌여보려는 것 같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그들은 그 열기가 식을까봐 국회도 열지 않고 버티고 있다.
<탁월한 정치적 종교인들>
놀라운 집념으로 한 私學사학을 일으켜 잘 이끌어오던 대학이 있었다. 그 사학이 참으로 어리석은 집안싸움으로 하루아침에 임자 없는 나룻배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검은 수단의 성직자는 이 나룻배를 정치적 활동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알하기 위해 드나들고 놀랍게 광범위한 좌파들이 일사불란하게 그 수단 치마폭에 몰려 들어 정략의 지시를 받고 그 정치적 영향력의 약 기운을 받으러 드나들었던 것 같다. 덕분에 빚 한푼 없이 탄탄하던 이 사학은 구멍이 숭숭 뚫어진 빚더미의 사학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거덜내면 그 대학을 가로챈 세력들은 견디기가 더 유리하다. 「임시」의 딱지를 떼고 정식 세력으로 정착하려는 기도도 진행중인 모양이다.
성직자의 위세를 교회가 아닌 세속에서 충분히 발휘할 줄 아는 탁월한 정치적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모두 좌파에만 동조하는 것일까. 좌파이고 싶은 사람들이 종교에 참여하여 그들의 뜻을 펴는데 종교를 활용하는 것이 먼저였던 것은 아닐까.
좌파 지향이 아닌 종교인이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전례를 별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성직자의 정치 참여는 좌파 지향과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것 같다.
계속해서 이런 풍경을 보고 있어야 하는 우리 신세가 하염없이 서글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