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
프랑스의 혁명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는 혁명 이후 프랑스의 근본이념이자 국민의 정신적 모토가 되어왔다. 자유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이루는 근간이며 평등과 박애를 하나로 결합시키려는 시도가 사회주의로 나타나고 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류가 박애의 정신으로 충만할 때 자유와 평등은 공존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애와 욕구를 지니고 있다. 신학자이며 경제학자이기도 한 마이클 노박 (Michael Novak, 1933 ~ )은 자본주의는 죄인을 위한 제도이며 사회주의는 성인(聖人)을 위한 제도라고 색다른 정의를 내린바 있다. 성인은 극히 소수이며 인간은 사실 상 죄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인류애로 충만하여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이타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전제부터가 잘 못 되어있다. 인간은 자유로우며 욕구를 좇아서 움직이는 존재이지 평등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의 뜻은 무엇인가?
진보주의자는 물론이요 스스로 보수라고 칭하는 지식인들마저 자신도 모르게 범하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하느님의 평등의 정신이 곧 정의이며 다만 인간의 탐욕과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현실세계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구현되지 않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실이 아니다.
하느님 앞에 인간이 평등한 것은 인간의 인격이 평등하다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같은 모습으로 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피 땀 흘려 잡초 우거진 황무지를 개간한 사람에게 여름 한철 게으름을 피우던 자가 수확기에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며 가진 것을 나누자면 이것이 과연 하느님의 정의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과 기본권이 평등하다는 이야기이지 인간의 겉모습이 또는 사는 모습이 평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필자는 여기에서 116년 전에 발표된 하나의 교황문헌을 제시하고자 한다. 1891년 5월 교황 레오 13세에 의하여 발표된 회칙(回勅)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에서 교회는 평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확립되어야 할 주요 원칙은 인간의 고유한 조건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조건에 비추어볼 때에 세상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기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온갖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가장 뛰어난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즉,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능, 성실, 건강, 체력을 지니지는 않는다. 이같이 불가피한 차이로부터 당연히 사회적 조건들의 차별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차이는 오히려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모두 이득이 되는데, 사회 생활이 다양한 소질들과 서로 다른 직분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직분들을 수행하도록 움직이게 해주는 기본 충동이 곧 각 처지의 불평등인 것이다.
우선 독자들의 이해를 보다 충실히 하기 위하여 교황의 사목교서인 회칙(回勅) 및 “새로운 사태”에 대한 설명을 부가하고자 한다.
회칙이라 함은 직역하면 ‘돌려보는 칙령’이라는 뜻으로 전 세계 교회에 대하여 발표하는 교황의 공식적 사목교서이다. 회칙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 문제에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며 내용이 교리적이고 사회적이며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가 무오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정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는 그 교리 및 도덕적 내용에 동의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성서는 목축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구약과 농경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신약으로 나뉘어 진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사회발전에 대하여 교황청은 성서에 버금가는 해석과 교의(敎義)를 발표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리하여 발표된 것이 1891년 발표된 전술한 회칙 ‘새로운 사태’이다. 필자는 이하에서 독자들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회칙 ‘새로운 사태’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이하에서 인용하고자 한다.
‘새로운 사태’의 개요
• • • 본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미 수 차례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본인의 사도적 직무에 대한 자각으로 말미암아 정의와 평등의 기준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칙들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으로 다시금 이 문제를 광범위하게 취급하고자 한다. 이 문제의 해결은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권리와 상호 의무를 명확하게 규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교활하고 선동적인 사람들이 이 같은 허점을 이용하여 그릇된 판단을 유도하고 민중을 혼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해결책
• • • 교회가 수 차례 엄중히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리 대금업은 여전히 성행하고 파렴치한 모리배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형태로 그러한 불의가 자행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산과 상업이 소수에 의해 독점 장악되어 극소수의 탐욕스런 부자들이 가난하고도 무수한 노동자 대중들에게 노예의 처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멍에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이러한 악의 치유를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부자들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서 사유 재산을 없애야 하며 그 대신 모든 이를 위한 공동 재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유 재산을 공유화하고 또 모든 재화를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때에 사회악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사유 재산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명백하게 정의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사유 재산권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다.
사유 재산권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짓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짐승에게는 자기를 통제하는 능력이 없다. 짐승은 두 가지 본능, 즉 개체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에 의해 지배당하고 규제받는데 그 본능들은 짐승이 민첩한 행동을 하게 하고 그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반면에 짐승의 모든 움직임을 결정하고 제한한다.
이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는 짐승이 자기 주변에서 발견하게 되는 제한된 수단들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짐승은 감각과 특수한 감수성에 의해서만 움직이므로 자기 주변의 테두리를 벗어나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 인간의 본능은 짐승의 본능과 전혀 다르다. 인간도 다른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감각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물질 세계의 재화들을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감각 능력을 충만히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적 본성이 아무리 영향력을 미칠지라도 인간의 본성을 제한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의 본성보다 훨씬 열등하며 또 이 본성에 봉사하고 따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출중한 특권, 즉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고 짐승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존재가 되게 해주는 구성 요소는 지성 또는 이성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은 다른 모든 짐승들처럼 이 땅의 재화들을 단순히 이용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최대한으로 활용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곧 안정된 재산의 소유권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사용됨으로써 소모되는 일시적 사물들뿐 아니라 사용되더라도 소모되지 않는 항구한 사물들까지 소유하는 권리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본성을 더욱 깊이 통찰해 보면 한층 더 명백해진다. 인간의 욕구는 한번 충족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즉, 오늘 충족된 욕구가 내일 다시 꿈틀거린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이 자기의 끝없는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켜 줄 재화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그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였음이 분명하다. 풍성한 결실로써 인간에게 갖가지 재화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토지뿐이다.
실정법과 신법에 의해 인정되는 사유 재산
. 이처럼 명백한 근거에 비추어볼 때, 어처구니없는 이상론을 되풀이하는 사람들의 주장 안에 모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땅의 활용과 땅의 여러 가지 생산물들은 인간에게 허용하지만 인간이 경작한 토지나 새로 개간한 농토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소유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인간에게서 자기 수고의 결실을 교묘하게 빼앗아가게 된다는 것을 그들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다.
토지는 경작인의 노동과 기술에 의하여 변화된다. 즉 황폐한 땅, 불모지가 비옥한 농토로 된다. 이와 같이 토지를 개량하는 노동은 그 토지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정도로 인격의 자국을 남겨둔다. 그렇다면 그 토지를 경작하지 아니한 다른 사람이 그 결실을 가로채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겠는가? 결과가 반드시 원인에 뒤따르는 것처럼 노동의 결실도 당연히 수고한 당사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가정과 국가
자녀 부양의 책임 완수는 가장이 후에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상속시켜 주게 되는 풍성한 재화를 획득함으로써 가능하다. 왜냐하면 가족 사회는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국가에 선행할 뿐 아니라 국가보다 더 중요한 사회이므로 이에 마땅한 권리와 의무를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가 가정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기를 바라는 것은 위험 천만한 큰 잘못이다. 만일 어떤 가정이 불행하게도 극심한 곤경에 처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그 곤궁에서 헤어날 수 없다면 그러한 상황에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분명히 타당한 일이다. 가정은 국가를 형성하는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 국가의 개입은 정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혼란과 무질서 속에 빠뜨려 증오와 견디기 어려운 참혹 상태를 초래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상호간의 원한, 비방, 불목의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고 개인의 재능과 근면을 고취시키는 자극이 전혀 없어져 재화의 원천이 근원적으로 고갈되어 버리고 그토록 염원해 온 평등의 꿈은 결국 굶주림과 헐벗음이 널리 만연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투쟁 없이도 계층들간의 화목은 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 중에서 가장 잘못된 견해는 한 사회 계층이 다른 계층과 본성상 적대 관계에 있으므로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은 성격상 상호간에 끝없이 투쟁하기 마련이라고 내세우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성과 참된 진리에 완전히 상반된다. 인체에는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일치하며 좌우 대칭이라 불리는 균형 잡힌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본래 국가도 부유한 자들의 계층과 가난한 자들의 계층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또 그 결과 균형을 유지하기를 요구한다.
두 계층은 각기 다른 계층을 절대 필요로 하는데, 자본은 노동 없이 있을 수 없고 노동은 자본 없이 있을 수 없다. 화합이 만사를 아름답고도 질서 정연하게 만드는 반면에 끝없는 반목은 혼란과 잔혹만을 조장할 뿐이다. 그리스도교는 분쟁을 종식시키고 나아가 분쟁의 뿌리 자체를 근절시키는 놀라운 힘을 풍성히 지니고 있다.
교회가 해석하고 수호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에게 정의가 당당히 요구하는 의무들에서 출발하여 그들에게 그들 상호간의 의무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서로 화해시키고 일치시키는 강한 힘을 지닌다.
자본주의에 대한 교회의 뜻
이상에서 고찰한 대로 교회의 뜻은 분명하다. 사유재산제도와 인간의 무한한 미래에의 욕구, 자손에 대한 상속 등 이 모든 것이 “자손을 낳고 번성하라”는 조물주의 뜻에 합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부의 간섭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계층간의 반목은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를 조장하나 계층간의 화합은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다.
따라서 정글 자본주의라는 표현으로 공공연히 창의(創意)와 열정(熱情)을 근간으로 하는 사유재산제도를 폄훼하는 일부 정치인의 의도는 교회의 뜻에 명백히 배치된다. 이들의 행동은 110여년 전 교황청의 회칙 ‘새로운 사태’가 발표된 시점에서 교황이 우려했던 다음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행태를 연상시킨다.
교활하고 선동적인 사람들이 이 같은 허점을 이용하여 그릇된 판단을 유도하고 민중을 혼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다.
이에 한술 더 떠 어떤 정치인은 20대 80의 구분을 들먹이며 편가르기를 하고 있고 가진 자에 대해 가지지 못한 자의 분노와 질투심을 부추기고 있다. 이 역시 회칙에서 언급되고 있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다시 도래한 것이 아닌 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사회주의자들은 부자들에 대한 가난한 이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서 사유 재산을 없애야 하며 그 대신 모든 이를 위한 공동 재산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제를 이끌어 가야 할 권부의 핵심인 청와대의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은 다음의 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무지를 넘어 우리에게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공포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소수의 승자만 존재하고 다수의 패자는 존재할 수 없는 ‘카지노 경제’는 비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밀림보다도 못합니다.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밀림에서도 강자는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중략) 그러나 승자독식체제의 경제에서는 강자의 탐욕이 끝이 없습니다. 그들은 밀림의 제왕인 사자보다 백배, 천배 더 잔인합니다. 밀림에는 평화가 있지만, 카지노 경제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카지노 경제에서는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비정한 사회입니다.
사자는 사냥을 해서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발전의 의지가 없고 더 이상 사냥을 하더라도 먹이를 보관할 수 없으며 또한 이성과 지성을 갖지 못했으므로 수 천년 간 동일한 삶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지성과 이성을 부여 받고 있으며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도구로써 사유재산제도가 인정됨으로써 자본주의에 의한 찬란한 번영의 결실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지성이며 이를 구현하는 제도가 바로 사유재산제도이다. 이는 전술한 회칙의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밀림의 맹수보다 탐욕스러운 카지노 경제 운운 한다는 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미래에 대한 발전의 욕망을 포기하고 그 날 번 것은 그날 모두 분배하는 원시적인 공동경제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인가?
일부 정치인이 정글 자본주의 운운하는 것은 찬란한 문명과 번영을 이룩한 인류의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제도는 가지지 못한 자의 상대적 박탈감과 배아픔이라는 역기능을 초래하였으므로 자본주의가 아닌 공동재산분배제도로 가자는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20 대 80의 계층구분을 논하며 80%의 사회적 약자를 선동하는 자들의 본심이다.
자유와 평등은 같이 갈 수 없다
자유로운 나라는 평등하지 않으며 평등한 나라는 자유롭지 아니하다. 그리고 평등한 나라는 가난하다. 지금 지구상에 평등을 추구했던 나라는 모두 사라지고 북한과 쿠바 만이 사회주의적 평등을 추구하는 나라로 남아있다. 이들의 지금 비참한 생활상은 구구절절 다시 이 글에서 재론할 필요도 없다. 300만이나 되는 인민이 식량난으로 굶어 죽은 북한이나 수도의 번화가에서 우리의 중학생 벌 밖에 안 되는 어린 여성들이 거리의 여인으로 전락하여 호객하는 오늘날 쿠바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미국은 자유시장경제가 가장 고도로 발전된 나라이다. 미국에서 평등이라 함은 기회의 평등이다. 기회의 평등이라 함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골고루 보장된 것을 뜻한다. 활력이 있는 사회라 함은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가장 많이 부여된 나라, 계급간의 이동이 자유로운 나라이다.
평등주의자들의 위선
평등주의자들은 거의가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대상은 지극히 모호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사랑하라고 이야기 하기보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개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류를 사랑할 자격이 없다. 내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직장동료를 사랑하지 못하고 내 이웃을 욕하는 사람이 어떻게 인류애를 논하고 서민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베타니아의 마리아 막달레나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바르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을 때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은 향유를 사는 데 든 돈이 탐이 났던 것이다.
좌파들은 항시 추상적인 명분을 내세운다. 그들은 서민을 위한다고 하며 80%의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입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잘 살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하나 구체적인 대상은 없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가지지 못한 자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 선동하여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들 달성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을 뿐 진정 내 이웃에 대하여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몫을 희생하고 그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데는 인색하다. 이들은 이념을 희생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
진정으로 희망 없고 기댈 곳 없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극한상황에 몰린 자살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은 외면하기 일쑤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평등에만 매몰되어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은 정글자본주의라고 매도하면서 반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랑은 구체적인 것이며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예수는 당시 하층민이었던 세리와 창녀를 사랑하였고 그들을 가리켜 위선에 젖은 바리새인 같은 존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 갈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 간386주사파들이 기득권층 운운하면서 부유한 이웃은 증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인류애를 논하고 서민을 들먹이며 이념에 미쳐 평화, 양심, 개혁 등을 팔고 다니는 데에서 예수님이 독사의 족속이라고 불렀던 이 천년 전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이들 위선자들이 논하는 사랑은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며 대상도 모호하다. 그리고 언제나 미래, 평화, 개혁, 양심, 선진, 연대 등등 듣기 좋은 소리로 치장하고 포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포장에 한번도 아니고 두번, 세번 씩이나 속아 넘어갈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을까? 이들이 곧 국민경제를 파탄내고 우리 자녀들이 북한의 꽃제비처럼 되어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방황하게끔 만드는 망국의 세력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맺음말
개혁이니 평등을 주장하는 자들은 지금 비록 어렵더라도 멀고 길게 잘살기 위해서 개혁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멀고 길게 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서민들은 지금 당장 배가 고프다. 지금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죽어서 천당 가면 멀고 길게 잘산다는 말씀인가? 추상적이고 이해가 안가는 소리를 하기 전에 무엇 하나라도 민생을 먼저 챙겨야 할 것이 아닌가?
도대체 그들이 이야기하는 멀고 길게 잘 사는 시점은 언제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늙고 병들어 뱃가죽과 등가죽이 달라붙어 숟가락 뜰 힘도 없을 때 그 때 개혁론자들이 밥 먹여 주겠다는 이야기인가?
젊은이들이여! 언제까지 이런 위선자들의 헛소리에 속아서 귀 기울이며 살 것인가?
우리는 지난 10년간 어떻게 하여 우리가 이처럼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를 한번쯤 돌아보아야 한다. 사랑이나 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바로 내가 남이 안보는 곳에서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요, 사랑이라 함은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내 자녀를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서민이 있고 나라가 있고 민족이 있고 인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알지 못한 채 국민의 하향평준화를 평등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하여 국민의 빈곤층화를 이끄는 세력으로 인해 경제는 파탄 나고 서민들은 더욱 더 어려운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자각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미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졸업- MBA , 미 공인회계사
산업은행 근무. 한국기업평가 컨설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