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2007년 8월호
담당자: 원기섭 편집부장 2248-2395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북핵 문제가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핵 문제는 미국이 대북 직접대화에 나서 2·13 합의를 성사시킴으로써 해결의 기미를 보였으나 이내 불거진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 은행(BDA)의 북한구좌 해제문제로 합의는 좌초되었다. 그러나 지난 6월 북한구좌 문제가 해결되면서 북한은 2·13 합의에서 약속했던 ‘핵폐쇄 및 봉인’을 위한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실무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여 폐쇄대상 시설과 방법, 절차 등을 협의한데 이어 북한 스스로도 2·13 합의를 이행할 것으로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북핵 해결의 전주곡인지 아니면 핵게임을 연장하기 위한 평양의 전술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해답은 오직 한 사람만이 쥐고 있다.
미국의 양보와 2·13 합의
2·13 합의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부시 대통령은 스스로 천명했던 ‘3불(不) 원칙’을 포기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에게 파격적인 양보를 했다. 부시 대통령은 ‘ABC (Anything but Clinton)'을 외치면서 전임 정부의 대북 유화책을 비난하면서 취임했고, ’북한과의 직접대화 불용‘, ’북한에 대한 보상 불용‘, ’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의 핵해체)이외의 타결 불용‘ 등 3불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2007년 1월 베를린에서 북한과 직접대화를 가졌고, CVID에 상당히 못 미치는 내용의 2·13 합의에 서명하면서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 등 보상책들을 제시했다. 이로서 부시 대통령의 북핵 정책은 사실상 NBC (Nothing but Clinton)으로 회귀한 셈이다.
2·13 합의에서 북한은 60일 이내에 핵시설과 프로그램을 폐쇄(shut-down)·봉인(seal)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한 IAEA 사찰단의 입국초청을 약속했고, 이어서 핵시설과 프로그램의 불능화(disablement)를 약속했다. 물론 이 약속에 대해 6자회담의 여타국은 에너지 지원과 함께 정치적·경제적 지원을 약속했으며, 현재 일본인 납북자 문제의 미해결을 이유로 일본 만이 대북 에너지 지원 약속에 불참하고 있다. 한국은 북한에 보낼 100만 톤의 중유 중에서 5만 톤을 핵폐쇄·봉인의 대가로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햭폐쇄 및 봉인 조치는 BDA의 북한 돈이 해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60일 이내에 취해지지 않았으나, 북한 돈 문제가 해결되면서 이행이 가시화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에 대해서는 한미 양국에서 양 시각이 존재한다. “약인가 독인가”하는 논쟁이 존재한다. 즉, “북한이 강경책만으로는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네오콘 적인 이념에서 벗어나 실용주의적인 핵외교로 선회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기만적인 핵게임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북한의 시간벌기 전술에 말려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 논쟁에 대한 해답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북한 결정자에 달려있다.
북한이 완전한 핵포기를 결단한 상태에서 핵폐쇄와 봉인 조치를 취한다면 북한이 완전 핵폐기를 위한 추가합의에 불응할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은 북핵 해결을 이끌어낸 ‘성공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반대로 북한이 2·13 합의를 계기로 평화공세를 통한 시간벌기를 시도하면서 끝내 핵을 고수하는 경우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발목이 잡힌 상태에서 약화된 국내정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성공사례에 갈급해하다가 북한에 이용만 당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시 불기 시작한 ‘평화의 바람’
2·13 합의 직후에 불었던 ‘평화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머릿맡을 지켜온 북핵 문제에 지친 한국 국민은 ‘핵무기 폐기’가 아닌 ‘핵시설 폐쇄·봉인’ 합의에도 안도하고 싶었다. 이를 틈탄 일부 ‘개혁’성향의 정치인들은 보주주의자들을 향해 “그동안 북한을 오해하고 음해한 사실을 사과하라”고 욱박지르는 경박함을 노출하기도 했다. 이 바람은 이제 더욱 강하게 불 것이다.
러시아 은행을 통해 BDA의 북한 돈이 풀려나갈 수 있게 되자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6월 21~22일 북한을 방문하여 박의춘 북한 외무상,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을 만나 2·13 합의의 이행문제를 협의했고, 이어서 6월 22일 한국에 온 힐 차관보는 “북한의 핵폐쇄 및 불능화 의지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도 논의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모든 핵프로그램의 포괄적 리스트를 논의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라는 답변으로 HEU 문제를 다루었음을 시사했다.
BDA의 북한 돈이 러시아 중앙은행을 거쳐 북한계좌로 입금된 것을 확인한 북한은 IAEA 실무대표단을 6월 26~29일 초정하여 폐쇄·봉인의 대상, 절차, 시기, 방법 등을 논의했으며, 이어서 베이징에 도착한 실무단의 단장인 하이노넨 IAEA 사무부총장은 북한에 사찰단을 상주시키기로 합의한 데 고무된 듯 “결실있는 토론이었다”라고 밝힘으로써 폐쇄·봉인 조치가 큰 탈 없이 진행될 것임을 시사했다.
한국정부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한국정부는 2·13 합의이행의 지연으로 보류되어온 40만 톤(1,600억 원 상당)의 대북 쌀지원을 6월 30일부터 개시하여 4개월 내에 완료하겠다는 전화통지문을 북측에 전달했으며, 7월 14일 이내 중유 5만 톤 중 1차분의 선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방침도 밝혔다. 이에 앞서 6월 21일 한국은 비료 30만 톤 (1,100억 원 상당)의 대북제공을 완료했으며, 유엔 세계식량계획(WEP)의 요청에 따라 옥수수 5만 톤, 식용유 1,000 톤, 분유 1,000 톤 (200억 원 상당)의 대북지원도 조만간 개시할 예정이다.
6자회담 재개와 6개국 외무장관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행보로 보이는 송민순 외무장관의 미국 방문과 백종천 안보실장의 중·러 방문도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 27일 북한이 3기의 단거리 미사일을 실험 발사한 사실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미사일이 주한미군의 주력부대가 들어갈 평택을 겨냥하여 개발되고 있는 신무기일 것이라는 군사전문가들의 우려나 7월 2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국을 공격하기 위한 미사일”이라고 지적한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의 말은 평화에 바람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이 미사일은 구 소련이 개발한 SS-21 탄도미사일의 개량형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휴전선 근처에서 이동발사 차량으로 발사한다면 평택 미군기지, 오산 공군기지, 한국군 3군사령부 등이 사정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현재 국민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북핵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밝은 그림들뿐이다. 이 와중에 “또 한번 북한의 현란한 핵게임에 놀아날 수 있다”는 보수주의자들의 호각소리가 제대로 들릴 리는 만무하다.
만만치 않은 향후 일정
북한이 2·13 합의를 이행한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 만만치 않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폐쇄대상 핵시설을 확정하고 폐쇄방법과 사찰절차를 정하는 것에는 까다로운 기술적인 사항들이 수반될 것이다. 현재 전문가들이 폐쇄대상으로 예상하는 시설로는 영변의 5MW 원자로, 재처리 시설(방사화학실험실), 핵연료봉제조시설, 핵연료봉 저장시설, 태천의 건설중인 200 MW 원자로 등이 있으나, 8 MW급 연구용 원자로(IRT-2000), 동위원소생산연구소, 임계시설, 핵폐기물 시설, 핵실험장 등도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원자로를 폐쇄하는 것은 전기스위치를 내리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통상 원전긴급정지(SCRAM)를 위해서는 제어봉(control rods)을 서서히 내리면서 감열과 함께 가동을 멈추어야 하는데 영변 5MW 원자로의 경우 10일 정도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연 북한이 어떤 방식의 폐쇄를 원할 것인가 하는 것은 두고 봐야 알 일이다. 핵불능화를 위한 절차와 방법을 정하는 문제는 더욱 복잡하여 북한과 IAEA 간에 이견이 돌출할 가능성이 더 높다. 지금까지 북한은 2·13 합의에 대해 ‘잠정 가동중단에 합의한 것’으로 말해왔기 때문에 재가동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미국과 해석상의 이견이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농축 문제는 여전히 큰 걸림돌로 남아 있다. 북한이 존재를 계속 부인한다면 IAEA로서도 규명할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외교적 일정도 간단하지 않다. 합의이행의 어느 과정에서 6자회담을 재개할 것인가, 6자 외무장관 회담은 성사될 것인가, 어느 시점에 북미 수교나 북한의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 문제를 논의할 것인가 등은 복잡한 조정과 협의를 요하는 사안들이다. 미국이 북한이 가진 핵물질과 시설을 구매하는 방안이 협의되고 있다는 보도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2003년 말 리비아가 핵포기를 선언한 후 미국의 오크리지국립연구소(Oak Ridge National Laboratory)가 리비아가 보유했던 핵물질과 핵시설들을 뜯어갔는데, 이때에도 일정한 보상이 수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례를 감안한다면 미국이 북한의 핵시설과 핵물질은 구매하는 것은 북한의 비핵화를 가속화하는 방안으로 나쁘지 않다.
북한의 핵포기 결단, 가능한가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완전한 핵포기 결단이 가능한가하는 것이다. 핵포기를 결단한 상태라면 2·13 합의의 이행과 관련한 이견들은 사소한 문제로 전락할 것이며, 완전한 비핵을 위한 후속합의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단이 불가능하다면 현재 눈앞에 전개되는 장밋빛 그림들은 결국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가 되고 말 것이다.
북한에게는 핵포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우선, 핵무기는 북한에게 있어 절대절명의 체제수호 수단이며, 반세기에 걸친 대장정의 산물이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북한의 권력자가 1960년대부터 핵옵션을 꿈꾸어왔음을 여실이 증명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극심한 식량만으로 수백만 명이 굶주리는 중에도 북한은 국제적 고립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고난의 대행군’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불만을 봉쇄했다.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핵을 포기하는 경우 “위대한 지도자의 과학적 업적으로 통해 미제국주의자들을 극복했다”라는 스스로의 선전논리가 모순에 빠지게 되며, 핵포기를 자멸의 길로 받아들이고 있는 군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결국 북한의 완전한 핵포기는 선군정치의 포기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북한의 기득권층에게 있어 체제붕괴는 동독식 소멸이나 차우세스쿠식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때문에 개혁·개방을 거부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내놓은 것이 선군정치였다. 이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완전한 핵포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또 다른 조건으로는 북핵에 대한 중국의 부정적 인식, 핵보유 강행시 경제적 존립이 불가능하다는 명확한 인식, 미국의 확고한 북핵 제거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중국은 그 동안 6자회담을 주선하는 등 미국의 비확산 노력에 일정부분 협력해왔지만, 북한에게 노골적으로 핵포기를 강요하는 강압조치를 취한 적은 없다.
이는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대미관계가 소중할 수밖에 없지만 전략적으로는 미일동맹에 대결하는 구도를 피할 수 없는 중국의 이중적 위치를 대변하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일정부분 동참하면서도 북한의 존립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이중적 자세를 취해왔다. 중국은 국제사회가 대북 경제제재를 취하는 중에도 석유와 생필품을 공급해왔으며, 한국 역시 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내세워 인도주적 지원 등의 명분으로 대북교류를 지속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핵보유 강행시 경제적 존립이 불가능할 것으로 인식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부시 대통령의 대북 유화정책 선회와 한국사회에 불고 있는 평화의 바람이 북한으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가질 여지를 만들어 주고 있다.
과거 미국이 CVID를 고수할 시절 북한에게는 ‘핵포기 및 최대 보상’과 ‘핵개발 강행 및 국제재재’라는 두 가지 선택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한 핵폐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지 않은 2·13 합의만으로도 부시 대통령이 만족한 모습을 보이고 한국사회에 대북 기대감이 넘치는 것을 확인하고 있는 북한이라면, 당연히 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미국과 협상할 수 있고 남쪽으로부터의 지원도 받아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여건들을 종합할 때 북한에게 있어 완전한 핵포기는 어려운 선택일 수밖에 없으며, 설령 거론되더라도 시간을 벌기 위한 위장 핵폐기이거나 부분적 핵폐기에 그칠 공산이 크다.
북한의 핵평화공세 가능성 배제 못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이 어렵다는 점을 전제로 할 때 우선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국제사회와 남쪽을 향한 ‘핵평화공세’이다. 즉, 2·13 합의의 이행조치들을 충분히 홍보하면서 최대한의 반대급부를 챙겨나가는 시나리오이다. 북한으로서는 2·13 합의를 이행하더라도 더 이상의 비핵에 합의하지만 않으면 약간의 핵무기와 플루토늄 그리고 농축 프로그램을 유지할 수 있는 ‘부분적 핵포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위대한 지도자의 과학적 업적‘을 스스로 부인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필요가 없으며, 충분한 반대급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북한의 2·13 합의이행 의사 표명 직후 이행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북 쌀지원을 개시했고, 미국과 IAEA의 관리들도 2·13 이행 여부에 대해 잇달아 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북한의 핵행보가 한국의 정치상황과 불가분의 연관관계를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이미 2007년도 공동사설을 통해 한국정치에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으며, ‘민족’ 논리를 앞세워 한국의 보수세력에게 타격을 가하겠다는 의도를 밝히고 있다. 공동사설은 “민족중시, 평화수호, 단합실현으로 6.15 통일시대를 빛내여 나가야 한다,” “북남관계와 조국통일운동을 철저히 ‘우리 민족끼리’ 리념에 맞게 발전 공고화해나가야 한다,” “반만년 력사의 단일민족의 자부심을 가지고 주체성을 적극 살려나가며 우리 민족 내부문제에 대한 미국의 간섭과 방해책동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남한사회를 분열시키는 대남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할 때, 북한으로서는 완전한 비핵을 수용하거나 핵개발을 재개하여 분란을 일으키기보다는 제3의 선택으로서 2·13 합의 이행을 통한 ‘부분적 핵포기’를 앞세운 평화공세를 택할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북한이 이러한 시나리오를 선호한다면, 일단 2·13 합의를 이행하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이행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견을 제기하거나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3T(Timing, Term, Tempo)’를 조절하는 ‘양념’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원숙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한국의 당면과제일 수밖에 없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대남 핵평화공세를 펼친다면 우선 우려되는 것은 한국의 안보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위기이다. 2·13 합의의 이행을 통해 북한이 추가적인 핵무기 생산과 핵무기의 확산을 포기한다면 미국이나 일본의 안보에는 문제를 남기지 않겠지만, 소수의 핵무기이라도 한국에게는 심각한 안보위협이 된다. 사회적으로 그렇다. 이미 북한의 ‘부분적 핵포기’에 도취된 한국사회에서 위험성을 경고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는 곧바로 보혁 갈등으로 비화되어 한국사회의 분열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더욱 걱정스럽다. 한국에서 어떤 성향의 정부가 탄생하든 그것이 순수한 한국 유권자의 선택이라면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북한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면 그 자체로 한국정치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완전한 핵포기를 선택할 것인가 또는 부분적 핵포기로 평화공세를 펼칠 것인가 하는 것은 일단 북한의 결단에 달려 있다. 평화공세를 펼치는 경우 이것이 완전 핵포기로 가는 중간과정인지 핵포기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의 평화공세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전문가들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반국민에게 이런 분별력을 주문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지도 모른다. 북한으로서는 2·13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만으로도 반년 이상 장밋빛 신호들을 내보낼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가 될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진심을 보여주어야
현재 한미 양국에서는 북한이 2·13 합의의 준수를 위해 핵폐쇄, 불능화 등의 조치를 취해나갈 때 드는 비용문제가 전문가들 간의 논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완전한 핵폐기를 결단한 상태에서 취하는 조치라면 돈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유를 보내거나 핵불능화를 위해 또는 추가적인 대북지원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플루토늄을 내놓고 농축프로그램의 규명을 허락한다면 이것들을 해체하거나 인수하는데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
최대의 문제는 북한의 진심을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못하다는 점이다.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북한이 진정 완전비핵을 결단했다면 북한 스스로가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며, 2·13 합의 이행을 기다리지 않고 조기에 완전 비핵을 위한 추가합의를 수용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북한이 추가합의를 미룬 채 2·13 합의의 이행조치들을 부풀리는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일단 핵평화공세 의도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
미국 정부도 ‘완전 핵폐기’라는 목표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애초부터 부시 대통령의 양보는 미국과 한국에서 “약인가 독인가“라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었다. 즉, ”핵해결을 위해 필요한 실용주의적 선회“로 보는 시각과 ”북한의 기만적인 핵게임을 연장시켜줄 졸책“으로 보는 시각이 대립해왔다. 이에 대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을 역임한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6월 29일자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미국은 핵해결을 위해 유연함과 인내를 보여 왔을 뿐, 북한이 핵을 보유한 상태에서 관계정상화나 평화협정을 추진할 만큼 무원칙하지 않다”고 설파하면서 보수주의자들의 우려를 일축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서 우려가 불식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으로서도 ‘완전한 핵제거’가 불변의 목표임을 확실히 함으로써 북한에게 딴 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아야 한다. 부시 대통령의 변신이 ‘독’이 아닌 ‘약’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그래야 한다. 미국이 확고한 목표를 제시하지 않는 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2·13 합의만 이행하면 현 핵무기는 양해하겠다고 북한에게 언질을 주었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부시 대통령의 변신이 약인지 독인지는 북한이 완전한 핵폐기에 합의하는 추가합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2·13 합의이행으로 평화무드를 조성하는 데에만 집착하는지를 지켜본 후에 판단할 일이다.
요컨대, 북한이 2·13 합의의 이행을 가시화하고 있는 최근의 사태에 대해 한국과 국제사회는 정교한 분석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행보가 완전한 비핵을 결심한 상태에서 어차피 거쳐야 하는 중간과정이라면 당연히 환영해야 한다. 하지만 완전한 비핵을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 시간을 벌고 한국사회의 보혁갈등을 부추기는 평화공세를 기도하는 것이라면 한국과 국제사회는 또 다시 북한의 장단에 놀아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북한의 진심을 파악하기까지는 어떠한 경솔한 단정도 금물이다. 지금까지 핵게임에서 북한은 ‘3T’를 장악해왔다. 한국과 국제사회는 '3P (precaution, prudence, patience 경계, 신중, 인내)'로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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