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2·13 핵합의에서 북한은 “60일 이내 핵시설 폐쇄”를 약속했지만, 북한은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맡낀 돈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행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제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BDA 건을 최대 관건으로 과대평가하거나 이 건이 풀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양 환호한다면, 이는 핵문제의 숲을 보지 않고 나무를 보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은 BDA 이후를 대비해야 할 때이다.
북핵과 관련하여 2·13 합의 이후 두드러진 두 가지 현상으로는 미국판 ‘햇볕정책’이 발원시킨 ‘평화의 바람’과 북한의 핵입지 상승을 들 수 있다. 이 바람은 ‘제국주의 승냥이’와 ‘악의 축’을 귓속말을 주고받는 사이로 만들었고, 많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2·13 합의만 이행되면 북핵이 해결되는 것으로 믿게 만들었다. 미국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해체(CVID)' 이외의 타결은 불용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던 시절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보상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핵을 고수하고 벌을 받을 것인가” 하는 두 개의 선택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미국의 석연찮은 태도가 북한에게 제3의 선택에 대한 기대감을 불어넣고 있다.
아쉽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첫째, 핵제거에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담론이 없다. 경계론자들이 ‘전쟁세력’으로 내몰릴까 전전긍긍하는 현상이나 보수야당이 화들짝 놀라 대북정책 기조를 바꾸려 하는 모습이 이를 반영한다. 둘째, 북한의 제3의 선택이 한국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해악에 대한 논의가 없다. 합리적 전문가들이 담론을 주도하는 성숙한 사회라면 ‘평화의 바람’ 속에서도 경계론은 존재해야 하지만 현재 한국에는 그게 없다.
어중간 핵해결이 위기 부를 수 있다
현재 북한 앞에 놓인 시나리오로는 일단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2·13 합의를 징검다리로 해서 확실하게 핵을 포기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합의를 ‘깽판’내고 핵개발을 강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가능성은 높지 않다. 체제수호의 핵심수단으로 보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공을 들여온 것이 핵무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완전한 핵포기는 쉽지 않다. 동시에 ’평화의 바람‘이 많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상황에서 북한 스스로가 밥상을 걷어찰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게다가 지금은 미국도 예전처럼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지 않다.
북한이 선호할 시나리오는 일정수준의 ‘핵억제력’을 고수하면서도 받을 보상은 다 받는 세 번째의 선택일 것이다. 2·13 합의는 플루토늄 핵무기 제조경로의 폐쇄와 불능화를 규정하고 있지만, 현존 핵무기와 플루토늄 그리고 또 하나의 핵무기 제조경로인 농축활동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즉, 합의를 이행하더라도 여전히 일정수준의 ‘핵억제력’이 남는다. 북한으로서는 ‘평화의 바람’을 믿고 2·13 합의만 준수하는 선에서 미국과 협상할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다. 북한의 김계관 부상이 3월 5일 미국과 수교대화를 벌이는 중에 “인도처럼 우리의 핵보유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북한이 활용하기에 따라서 세 번째 시나리오가 한국의 안보, 사회, 정치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정수준의 핵억제력’도 한국에게는 감내할 수 없는 안보위협이며, ‘평화의 바람’은 북한이 한국사회를 분열시키고 보혁 갈등을 부추기는 특효약으로 악용할 수 있다. 전쟁도 주한미군도 필요없는 시대가 오는 것으로 믿게 만들기도 쉽다. 정치도 그렇다. 한국 유권자의 선택이라면 어떤 정부이든 합법적인 것이지만, 북한의 영향력이 작용할 여지가 생긴다면 그 자체가 한국정치의 위기이다. 까딱하면 매년 수십만 톤의 식량과 비료를 보내면서도 북핵을 제거하지도 못한 채 평양이 각색한 수순에 정신없이 끌려 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중심 지키기’
지금은 중심을 지키면서 북한의 의중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선다면, 대북지원에 인색할 필요도 북·미 평화협상이나 남북 정상회담에 반대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남한사회의 분열이나 정치개입 또는 한미동맹의 와해를 노린다면 우리는 경계의 눈을 번뜩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닻줄 끊인 배처럼 중심을 잃고 흔들릴수록 북한은 ‘어중간한 핵해결’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