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보내주신 신부님께 답변
임광규 베네딕토(신관동 본당)
신부님께서 저희 e-mail 로 보내주신 글을 잘 읽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쓴 『하느님의 것』『가이사의 것』을 언급하시면서, 신부님께서는 저희에게『1980년에 있었던 광주의 사건을 무지한 폭도들에 의한 사태로 보십니까? 아니면 소위 말하는 민주화혁명으로 보십니까? 그리고 만약 혁명으로 보신다면 그 당시에 신부들이 그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했던 것에 대해서 사회에 함부로 참여한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목숨을 걸고 의롭게 활동한 것으로 보십니까? … 이러한 질문을 드리는 것은 … 편집자의 집필방향을 알고 싶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라고 질문을 보내주셨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의 질문을 받고 먼저 생각한 것은 성심성의로 답변을 드려야겠다는 것입니다.
1984년 영국에서 강력한 위력을 가진 석탄광부노동조합이 정부의 국영 석탄광산 대다수의 폐쇄에 반대하여 대대적인 파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때마침 런던거리를 지나면서 마가렛 대처 수상 사진에 붉은 글씨로 파시스트라고 쓰고, 나치의 상징인 하겐크로이츠를 대처 이름 위에 마구 갈겨쓴 페인트를 본 일이 있습니다.
광부들이 파업을 계속하고, 그 가족들이 생계를 걱정하는 애절한 사연이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대처 수상은 많은 석탄광산들을 폐쇄하고 민영화를 강행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사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가이사의 것』이 아닐까요.
2007년 이른 봄부터 한국에서는 농촌 공장지대 도시를 가리지 않고 길거리에 『한미 FTA는 제2의 한일합병이다』 『자유무역협정 체결하면 농민은 죽는다』는 플라카드들이 즐비하였습니다.
한미 FTA를 추진하는 전문가들의 논리와 FTA를 분쇄하겠다는 농민운동가들 일부 노조조직 책임자들의 주장이 서로 아주 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사인『가이사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대처의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 광부들의 파업이 정당하다고 지지하는 사람들, 한미 FTA를 지지하는 사람들, FTA 분쇄를 결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자기들 주장이 옳다고 설득하고 상대방 주장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파(派)와 당(黨)으로 나뉘어 싸웁니다. 이것이『가이사의 것』의 속성일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문명성(文明性)의 본질은, 이런 세상일의 투쟁에서『관용의 정신』을 정착시킨 게임 룰(game rule)에 있습니다. 의회의 토론으로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 내는 절차입니다.
1935년 5월에 스페인의 과격좌익 정치세력이 자기들이 속한 인민전선 세력의 정부에게 대기업, 금융, 교통, 통신을 국유화하고, 군대 경찰을 해산하고, 토지를 국유화하고, 그리고 모든 가톨릭 수도원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혁명세력의 요구와 이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다툼 속에서, 1936년 2월부터 6월까지 170개의 성당이 불에 타고 269명이 암살되고, 133회의 총파업과 216회의 지역파업이 있었습니다.
이 혁명세력에 의하여 1939년까지 3년 동안, 13명의 주교를 포함한 4,184명의 사제, 2,365명의 수사, 283명의 수녀가 살해되었습니다.
때로는 사제들로 하여금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하고서 묻어 죽였습니다.
더 많은 수의 평신자들이 성직자 수도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십자가를 몸에 걸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성직자를 집에 기거하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되었습니다.
교회를 조롱하는 혁명지지자가 톨레도 대주교의 제의를 입고 대주교 노름을 하다가, 진짜 대주교로 오인한 혁명가에게 사살되기도 하고, 성당 성수로 면도를 하는 혁명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를 읽고 그 영화를 보고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파괴의 혁명가들을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였습니까.
혁명을 하려고 살인하는 사람들의 가슴도『정의의 실현』『이념의 실현』을 위한 일념으로 뜨거웠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200여년 전의 마라, 에베르, 로베스피엘로부터, 20세기에 들어 와서 레닌, 스탈린, 스페인 혁명, 모택동, 체게바라에 이르기까지 겪어보니,『관용의 정신』을 잃어버린『이념실현의 투쟁 』은 반문명(反文明)이었습니다.
『관용의 정신』을 게임룰로 정착시킨 문명성 사회안의 투쟁에서든,『관용의 정신을 잃은』반문명 소용돌이 속의 투쟁에서든, 사람들은 각자의 직분과 언어가 다릅니다.
2개의 회사가 계약을 맺어 공동의 사업을 이루려고, 협상을 하고 타협을 하는 과정에서, 쌍방의 경영자들이 마주 앉고 쌍방의 변호사들이 마주 앉아서 논의합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의 협상에서 조차도, 경영자의 언어가 다르고, 법률하는 사람의 언어가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합니다. 경영자는 화합으로 달성할 수 있는 내용을 머리에 그리면서 협상하고, 변호사는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을 머리에 그리면서 이를 미리 막는 구상을 제시합니다.
하물며 사회에서 서로 대립하여 상대의 주장을 누르고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과정에서 그 언어가 서로 다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읍니다.
성직자의 언어가 다르고, 사회과학자의 언어가 다르며,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의 언어가 다르고, 정치활동을 하는 시민의 언어가 다릅니다.
몇 달이 넘는 파업에서 생계를 위협받는 광부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위로해 도와주고, 농사일하다 허리를 다친 60대 농부를 격려해주며, 혁명의 전투를 하는 중이라도 즉결재판의 총살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살인을 규탄하는 것은『하느님의 것』을 맡는 사제들의 직분이고 성직자의 언어입니다.
몇 일전, 미국 최대 시청 방송의 유명한 앵커맨이 자기의 여러 차례 낙태 찬성을 매우 비판한 바로 그 가톨릭사제를 초청하여 대담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그 앵커맨의 유창한 논박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맞선 그 신부는 그에게 “당신이 나의 본당의 신자라면 당신의 영성체를 금지하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것』을 말하는 성직자의 언어가 아닐까요.
그러나 광부의 아내와 어린 자녀를 애처로워하던 나머지 대처 수상의 경제정책을 정의에 반한다고 논리를 펴거나, 허리 다친 농부의 생계를 걱정하던 나머지 FTA가 가난한 사람을 희생하는 비정한 조약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그리스도교 문명을 지키려고 교회파괴의 혁명가들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을 파시스트라고 규탄하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 성직자는『가이사의 것』에 들어와서, 파(派)와 당(黨)에 편드는 것으로 됩니다.
성직자의 언어 대신, 사회과학자의 언어, 작가의 언어, 정치인의 언어를 사용하는 성직자로 되어, 그 직분을 벗어나게 되고,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저희는 신부님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저희는 신부님이 폭도이든, 혁명가이든, 이를 막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변함없이 이웃으로 용서하고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상에 이런 따뜻한 용서와 사랑을 맡은 분들이 있어야 한다고 정해 놓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 회신이 신부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도록 애 썼습니다. 그렇지만 속 시원한 해답이 되지 않았다면, 이는 전적으로 저의 서투른 표현 때문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신부님의 훌륭하신 의견과 저희의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