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국제외교안보포럼이사)
개천절 4338주년 맞아 오늘은 더욱 특별한 감회를 느끼게 된다. 중국과의 역사분쟁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추구하는 목표는 “역사 빼앗기”이며 “역사분쟁”이다. 여기에는 고구려 역사만이 아니다. 고조선의 역사와 발해의 역사 까지도 포함이 되며,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의 역사에서 2000년여 년의 역사로 줄어드는 것이다.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한국을 “4마리의 코끼리에 둘러싸인 개미”로 비유하며 “정신을 차리고 외교력을 기르라”고 뼈저린 충고를 하고 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한국외교의 현주소를 너무나 생동감 있게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세계 모든 나라가 부러워하고 경탄하던 아시아의 “용” 이 20여년 만에“개미”로 전락했으니 누가 그 책임을 져야하는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한국의 국가경쟁력도 금년 1년 새 5단계 추락해서 19위에서 24위로 뚝 떨어졌다.
증권시장에서는 미-영의 뭉칫돈이 1992년 증권시장 개방 이후 최대치를 기록하며 한국을 빠져 나가고, 주한미군의 핵심 전력인 미 2 사단을 거느리고 있는 미8군사령부가 해체되어 한국을 떠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동안 수 없이 우려하고 경고 했든 최악의 상황이 몰려오고 있다. 올 것이 오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식 “자주외교”가 자초한 결산서다.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 가정교사”를 자임했던 문정인 국제안보대사(연세대교수)도 한국의 4강 외교는 총체적 실패고 그 상황은 심각하다고 고백하고 나섰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국익을 실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 관계마저 원활하지 못하다고 정부를 질타하고 있다. 4강 외교가 심각한 국면으로 가면서 “자주외교”와 “동북아 균형자론”을 한국외교의 기본 틀로 짠 사람이 정부의 외교적 무능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적반하장도 보통이 아니다.
그는 반미친북 행보 때문에 북-미 관계에서 한국이 배제되고, 미-일 군사동맹에 기생하는 일본은 군사대국화를 추구하고 있고 정부의 대응은 실패작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김정일의 방중 때는 제때에 정보를 알려주지도 않았으며, 중국 고위층에 대한 접근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또 미-일과 멀어진 만큼 한-중관계가 가까워지지도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한국과 같이 작지만 강하고자 하는 강소국가(强少國家)들은 2가지 외교원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살아남는다. 첫째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냉엄한 사회임을 알아야 한다. 오로지 국가 이익만 존재하는 사회다. 둘째 이웃하는 모든 국가들, 특히 주요한 우방 국가들과는 어떠한 경우에도 선린우호관계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4강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도 반미, 반일, 반중, 반로운동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곳 고립을 의미하고 외교 통상의 재앙을 불러 오게 되어있다. 더구나 대통령 이 앞장서는 것은 회복하기 힘든 외교적 재앙을 자초하는 길이다. 노무현 외교는 이 원칙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오로지 북한 김정일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국민들의 대통령임을 포기하고 김정일 정권의 생명연장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온 나날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한 때 미국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중국을 생각해보자. 중국과의 역사분쟁이 한창이던 2004년 8월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한-중 역사분쟁을 무마하기 위해서 자칭린 주석과 우다웨이 차관을 한국에 보내어 전달한 구두메시지에서"양국관계 훼손 원치 않는다. “양측이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견지에서 서로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하기만 하면 우리는 충분한 지혜를 갖고 서로의 관심사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하고 5가지 항목에 걸친 구두합의서에 합의한바 있다.
정부는 중국과의 구두합의 정신을 믿고 “고구려연구재단”을 해체하고 고구려역사 전문가들에 대한 지원이나 협력도 없이 잠자고 있었다. 개점휴업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중국은 동북공정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지난 2년간 연구해낸 17편의 중국학자 연구실적을 최근 東北工程홈페이지에 올리며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제2의 “역사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은 2002년에 이미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집안과 환인 에서 박물관과 유적 바꾸기 작업을 이미 끝마친 상태이다. 고구려 역사는 중국 지방 정권의 역사라는 것이고, 그 증거로써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한 사실들을 박물관에 조목조목 나열해 놓고,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인들은 모두 중국 사람들이 되었다고 전시하고 있다. 또한 집안과 환인 역사 현장과 박물관을 우수 관광지로 지정하고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장에서의 역사왜곡은 2002년 에 완벽하게 끝이 난 것이다. 후진타오의 “역사분쟁휴전제의”는 이 역사 왜곡의 현장을 기정사실로 인정하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중국이 최초로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은 24년 전의 일이다. 서길수 박사(고구려연구회이사장)가 감지한 것이 22년 전의 일이다. 서 박사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서 그 당시 정부요로와 국민들에게 발을 구르며 쉬지 않고 경고하며 부르짖었다. 그러나 누구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앞장 서야할 정부는 예감하려 하지도 않았다. 정부의 책임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역사관도 국가관도 없었다.
중국의 경우 동북공정은 민간단체나 역사학자들이 주도한 일이 아니다. 당과 중국정부가 선두에서서 만들어 낸 국가적 사업이다. 학술단체의 성격과 영역을 벗어난 정치 외교적 사건이다. 사실에 있어서 중-고교 역사교과서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역사왜곡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1979 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과 함께 시작된 중국의 주변국가 “역사 빼앗기”는 지난 24년 동안 중국사회과학원의 4.000명이 넘는 인적자원과 천문학적인 예산을 동원하여 진행되었다. 2003년 1년 동안 진행된 고구려역사 유적 복원사업에는 20년 연구한 결과와 1.000억을 들여 끝을 낸 것이다. 그 절정을 이룬 것이 유네스코(UNESCO) 고구려역사 문화재 유산등록이다. 중국의 뜻대로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중국에게는 이제 거칠 것이 없다. 고구려역사 왜곡은 국제기구의 공인도 받고 복원사업도 끝냈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에서 흥분과 격앙된 감정은 금물이다. 증오와 미움과 적대적 감정의 표출도 금물이다. 지금은 중국과의 길고도 먼 길을 가야할 “역사분쟁”의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싸움은 힘들고 갈 길은 멀고도 멀다. 그래서 우리 국민 모두는 더욱 냉정하고도 지속적이며 이성적으로 지혜를 모아 앞장서 대처해야만 한다. 무능하고 믿을 수 없는 정부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은 패권주의적 발상의 발로이다. 그러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이해와 협력을 얻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4강 외교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는 시점에서 중국과의 역사분쟁을 치른다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러나 분쟁의 중심에 있는 고구려역사를 지킬 수 있는 새로운 길이모색 되고 있는 것은 국가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 중심에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와 서 길수 박사가 유일하게 서 있어 국민적 신뢰와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하다.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지난 17년간 중국 동북삼성에 산재한 130여개의 고구려산성 답사를 마치고 1만여 장의 슬라이드를 제작 보관하고 있으며, 100시간이 넘는 동영상자료도 완벽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중 소실된 중요한 산성들에 대한 사진자료는 중국학자들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다. 초인적인 업적이다. 그러나 정부는 고구려연구회를 철저히 외면했다.
6번에 걸쳐 연구비 신청을 했지만 고구려 연구는 국가정책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등 학자들이 참석하는 국제회의 12회, 200여편의 발표논문, 그중 75명의 외국학자들의 논문발표, 41명의 중국학자논문발표 등 유일무이한 민간연구기관으로 자력갱생 하여 온 것이다. 논문집 17집이 나오고 300여편의 논문을 내놓은 고구려연구회의 업적은 실로 경이적이다. 그들이 이 나라의 역사를 지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반면 동북공정의 주체인 중국사회과학원은 3500명이 넘는 연구원과 50개가 넘는 연구소를 갖고 있다. 실로 방대한 인원과 예산을 갖고 있는 기관이다.
중국의 고구려 역사왜곡은 마대정을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직접 집필한 2권의 책을 살펴보면 명약관하하게 들어난다.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과 2001년 출판된 “고대중국고구려역사총론”을 보면 동북공정의 기본 의도와 진행현황, 동북공정에서 차지하는 고구려사 연구의 위상과 연구방향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중국은 남북한 고구려 역사 연구의 비 학술화 경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첫째 중국은 무엇보다도 최근 한반도 남북에서 일고 있는 소위 고구려 붐에 나타난 비학술적 의도와 경향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92년 한-중수교 이후 일어난 한국인의 중국 고구려유적탐방과 연구 붐을 “대고구려민족”에 공감하는 열기라고 보고 있으며 그런 열기는 북한보다 남한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고려민족주의”를 통해서 남북한이 통일하려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반도에서 북한정권의 붕괴와 통일에 대비한 국가전략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둘째로 냉전 시기에 조성된 조선전쟁과 반세기가 넘는 국가와 민족분열, 즉 서로 다른 의식형태와 사회제도 영향아래 비록 동일민족의 간격이 많이 벌어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민중 층에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민족 동질성이 엄존하며, 조선. 한국 쌍방에서 고구려를 민족의 표상으로 들고 나온 현상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며 남북 쌍방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찬란한 역사가 고구려 붐으로 나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고구려연구회는 지난 9월 14일 “중국의 동북공정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라는 연구 발표를 하므로 서 중국과의 역사분쟁에 대응하는 자신감을 표명 한 유일무이한 연구기관이 되었다. 불안감과 패배감을 버릴 것도 강력히 요청 하고 있다. 중국에서 내놓은 17가지“동북공정 연구과제 성과 요약문 번역”본을 내놓고 고구려연구회 5명의 학자가 고조선, 고구려, 발해 그리고 근현세사 연구결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연구 자료로 내놓은 것이다.
믿음직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특히 서길수 박사의 “동북공정의 고구려 연구 결과에 대한 평가”라는 논문은 큰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새로운 소프트 웨어개발을 통해서 한-중 역사분쟁의 핵심을 찌르고 중국의 논리와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중대한 역사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 박사의 주장은 중국의 학자들이 지금까지 수 백 편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서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는 것을 주장했는데 그 주된 논리는 다음과 같은 3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는 것이다. 1)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졌다. 2) 고구려는 국가가 아니라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다. 3)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인은 대부분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는 705년간 계속 중원 한족 왕조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아 신하로서 활동한 지방정권이지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중국이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기준으로 삼고 있는 조공과 책봉은 중원의 고대 화이관(華夷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중화사상은 4방에 동쪽오랑캐(東夷), 서쪽오랑캐(西戎), 남쪽오랑캐(南蠻), 북쪽오랑캐(北狄)가 있고 ‘한가운데 문명한 나라(中華)’가 있다는 극단적인 자기중심과 이웃에 대한 철저한 비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중원과 주변 나라들 사이에 이합집산이 거듭되면서 이런 천하관도 부침을 계속하다가 당나라 때 와서야 완성된다.
이 체계는 중원민족들 뿐 아니라 중원 북쪽을 지배한 북위, 요, 금은 물론, 중원까지 모두 차지한 몽골의 원나라나 만주족의 청나라에서도 모두 원용하므로 서, 수천 년 계속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요 외교적인 관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대국에서는 무조건 주변 국가에 신속을 요구하고, 소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안정을 위해 이 제도를 활용하였다. 당시 작은 나라에 대한 비하관념은 근대의 제국주의보다 더 심했고, 국가 체제가 흔들리고 어려운 국면에서도 중심국으로 자처하기 위해서는 이 제도를 이용해 허세를 부려야 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 이런 중화사상을 가지고 역사를 보는 잣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잣대를 가지고 동아시아 역사를 재보면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모두 중국의 역사가 된다. 고구려는 물론 신라, 백제, 고려, 조선, 왜, 베트남, 중앙아시아, 몽골…. 어떤 나라도 국가가 될 수 없고,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과연 705년간 계속 중원 한족 왕조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아 신하로서 활동한 지방정권인가? 이러한 중국의 주장은 고구려 705년간 중원에서 일어난 이합집산의 역사를 자세히 드려다 보면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당당한 독립 국가였고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다고 서 박사는 주장한다. 그 이유는 고구려라는 한 나라가 705년 동안 안정적인 발전을 계속하는 동안 중국에서는 35개의 나라가 이합집산을 계속하는 혼란기였다.
그 가운데 70% 가까운 24개 국가가 50년도 못 가고 망했으며, 86%가 넘는 30개 국가는 100년도 못 가고 망했다. 200년 이상 간 나라는 단 두 나라뿐인데 漢나라(221년)는 대부분 고구려 건국 이전에(고구려 건국 10년 망함)존재하였고, 당나라(290년)는 대부분 고구려 멸망(당나라 건국 후 50년) 이후에 존재하였다. 더구나 35개 나라 가운데 절반 정도는 중국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지배한 나라였다.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소수민족 지방정권은 705년이란 긴 세월동안 한 나라로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중앙 정부인 중원은 35개의 나라로 수없이 존망을 계속했다는 가소로운 논리가 형성되며, 고구려가 도대체 35개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의 지방정권인가 하는 의문에 부닥치게 된다.
아울러 동북공정은 고구려가 망한 뒤 인구의 이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고구려족 사람은 약 70만 명인데, 중원의 여러 지역에 옮겨 거주한 사람이 약 30만 명이고, 신라에 들어 간 사람이 약 10만 명이며, 말갈(발해)을 찾아간 사람이 10만 명 이상이고, 돌궐에 흩어져 들어간 사람은 만여 명으로 모두 50만 명이다. 이 숫자에 요동 같은 곳에 흩어져 생활한 유민과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더하면, 총수가 고구려족 인구수와 거의 일치된다. 그 가운데 신라에 들어 간 사람과 반도 즉 지금의 용흥강(龍興江) 이남에 남아 생활한 약 10만 명의 고구려족 사람만이 반도의 민족에 융합되었고, 대다수는 다 한족에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고구려 인구 총계에 대한 논리부터가 황당하다는 것이 다.
서 박사는 고구려 인구를 69만 호(戶)로 계산하고 있다. 한 호에 5명씩 잡는다면 약 (69만×5=)345만 명의 인구가 나온다. 고구려가 망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인구를 30만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에 남아있는 고구려인은 아무리 많아도 20만들 넘지 못할 것이고, 신라로 넘어간 고구려인 10만, 그리고 일부 돌궐과 일본에 간 고구려인과 모두 합친다고 해도 고구려 옛땅을 벗어난 인구는 45만을 넘지 않는다.
중국에 남은 인구를 30만을 계산한다 해도 45만은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300만 고구려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300만은 모두 고구려 옛 땅에 남아 있었으며 나중에 발해가 들어서면서는 발행인이 된다. 이것은 백제 사람들이 모두 신라인이 되었다 나중에 고려인이 되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발해 이후 과연 한족 국가가 압록강 북녘의 고구려 옛 땅을 완전하게 차지한 적이 있었는가? 발해를 멸망시킨 것은 중원 한족이 아니고 거란족의 요나라이다. 요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중원이 아니고 발해의 뒤를 이은 여진족의 금나라였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것도 중원이 아니고 북방 유목민족인 몽골족의 원나라였다. 원나라가 망한 뒤 처음으로 중원 한족 정권인 명나라가 들어온다. 그러나 명나라는 요동반도만 차지했을 뿐 요동변장 밖은 실질적인 지배를 하지 못했고 특히 영락(1403~1424) 이후로는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도 약화된다.
결국 금나라 후손들이 ‘대금(大金)’나라를 세우고, 뒤에 나라이름을 ‘청’이라 하고 민족을 ‘만주족’으로 바꾼다. 청나라가 망한 뒤 일본인이 들어와 실질적인 실력을 행사하였고, 만주족을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고 만주국은 이차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고구려 옛 땅의 역사를 보면 중원의 한족이 고구려 옛 땅을 완전히 차지한 것은 2차 대전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박사가 밝히고 있는 고구려 멸망 이후 옛 땅에 세워진 나라와 민족들은 다음과 같다. 발해(699-926, 228년) - 발해족(고구려 후예), 요(907-1125, 210년) - 거란, 금(1115-1234, 120년) - 여진족(발해의 후예),원(1206-1368, 109년) - 몽골, 명(1368-1662, 294년) - 명 + 여진, 청(1616-1911, 297년) - 만주족(여진의 후예), 일본ㆍ러시아의 진출(1911-) 실질적 권력 행사, 만주국(1932-1945, 13년) - 만주족. 앞으로는 바로 이 시기에 대한 논의가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를 대응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나라들의 귀속문제는 분쟁 극복 논리의 본질이 될 것이다.
물론 중국은 위의 모든 국가가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발해는 분명히 한국에서 남북국시대로 취급하고 있으며, 요와 원나라는 몽골이 자국의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모두가 두 나라에서 서로 자기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특히 서 박사가 주장하는 논리 중에는 금나라는 중국 역사인가도 재검토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금사(金史)에 보면 ‘금의 시조 이름은 함보(函普)이고, 처음 고려에서 왔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영일은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가 요양 발해인으로 금(金)ㆍ송(宋)의 대치 국명의시기 금조 여진족과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중원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주목할 바이다.”라고 하였다.
금나라는 중원 한족역사와 적대관계였지 중원의 역사가 될 수 없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히려 우리 역사와 친연성이 크기 때문에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더 진전되면 동아시아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국면에 들어설 것이라는 것이다.
청나라는 중국사인가? 중원의 한족 역사를 제일로 삼은 중국학자들은 청나라가 지배했던 역사를 정복역사로 규정하였다. 사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중원의 한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서 박사는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만주족과 우리 민족과의 관계에 대해서 고영일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주족은 동북아 지역에서 조선족과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온 주변 민족의 하나이다. 따라서 만주족은 조선족과 가장 가까운 사이이다. 만주족은 조선족과 한족(漢族) 사이의 중간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선족에 더 가까운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집단유사성 계수에서도 반영되어 있다.
조선족과 만주족과의 집단유사성 계수가 만주족이 조선족과는 3.60, 한족과는 5.04이다. 구체적으로 분류학적 징표에서 보면 조선족에 더 가까운 징표는 10개나 되지만 한족과 가까운 징표는 겨우 4개 뿐이다. 만주족에서 보이는 조선족의 유사한 특징들은 만주족이 현대 조선족과 함께 동북아시아의 고대 민족들 가운데서 고대 조선족과 친연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서 박사는 이상에서 중국이 ‘고구려=중국사’의 논리로 사용한 세 번째 주장,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인은 대부분 중국 땅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거의 증명 과정에서 이미 왜곡된 논리라는 것이다. 아울러 검토과정에서 고구려 옛 땅에 고구려 멸망 이후 들어선 국가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다시 연구해야 된다는 문제가 제기 되고 있는데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개발한 통일적다민족국가론(강역이론의 핵심)이란 현재 중국의 영토는 만주족 청나라에 의해 넓혀진 것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이 영토 안에 있는 소수민족과 그 영토가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논리를 개발한 것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다. 바로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원래 중원 위주의 역사를 현재 중국 영토 전역의 역사까지 끌어들여 확대하려는 것이 ‘동북공정’, ‘서북공정’, ‘서남공정’ 같은 구체적인 프로젝트로 나타난 것이다.
동북공정 문제가 나올 때마다 한국의 외교부는 동북공정은 학술적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 외교 문제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학술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학술적 연구 단계이기 때문에 항의 할 수 없고 그 연구 결과가 실용화 될 때 가서야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의 동북공정이 학술적인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는 그 단계를 넘어서 끝이 난 것이다. 역사 왜곡의 현장에 관한 사례가 이미 학문적 연구를 끝나 광범위하게 실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결국 2007년 1월 말 동북 공정은 끝나더라도 중국의 “역사 빼앗기 공정”은 계속될 것이다. 두 나라는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되풀이 할 것이고, 양국 학자들 간에 서로 토의를 하더라도 접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고도의 인내와 지혜를 갖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은 KTF의 자발적인 재정적 지원이다. KTF는 지난 1년여 동안 보이지 않게 나라사랑 Think Korea(한국을 생각하자)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이번 심포지엄을 지원 해왔다.
그 뿐만 아니라 현재 고구려연구회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서도 연구비를 계속 지원하며, 고구려연구회는 앞으로도 중국 동북공정을 17개 분야로 나누어 중국이 주장하고 있는 근거와 논리를 정리한 뒤 이에 대한 평가와 대응논리를 지속적이고도 끈기 있게 제시하는데 민간연구단체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믿는다. 결국 고구려 역사는 국민의 힘으로 지킬 수밖에 없다. 고구려연구회의 분발을 기원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