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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김원율 안드레아 (반포1동)
 

오늘 복음(요한 11,1-45)에서 예수님은 그가 사랑하시던 라자로라는 청년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구원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은 예수님의 수난으로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릴 위험에 처할 것임을 미리 에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킨 것을 보고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이기고 이 세상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분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 오빠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11,4).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3km떨어진 올리브 산 동편기슭에 자리한 마을입니다. 예수님께 그 자매가 사람을 보내어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전하자 예수님께서는 머무시던 곳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스승님, 바로 얼마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라고하며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타니아에 가시기로 결정하시고도 이틀을 지체하셨으며, 라자로가 죽은 다음 당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맞으러 나간 마르타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마르타에게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를 믿느냐?” 예수님의 자기계시 말씀은 마르타의 절절한 신앙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르타는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으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하여 예수님을 신성모독(神性冒瀆)으로 걸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타의 믿음, 바리사이들의 냉소와 불신이 어떻게 구원과 멸망을 구분짓게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접할 때 혹시 냉소와 불신을 나타낸 적은 없는지요?

 

예수님이 라자로의 집에 도착하시자 집안에 있던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을 뵙고 오빠를 잃은 슬픔에 울었으며 예수님도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11,33-35). 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대면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눈물흘리시는 장면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것(루카 19,41-42)과 이 장면 두번 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이들 남매를 사랑하셨습니다.  

 

라자로의 무덤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라는 말씀을 하셨고 라자로는 이를 듣고 무덤에서 걸어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코린토1서 15장에서 말하는 부활과 다릅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언젠가 다시 육신의 죽음을 맞아할 것이라는 점에서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부활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다시 영혼에 결합시키심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을 육신에 돌려 주실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97항).

 

라자로의 소생사화(蘇生史話)는 요한 복음의 일곱 표징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이적(異蹟) 사화(史話)이며 예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이 외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이는 태생소경을 치유하심으로써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자기계시 말씀이 실현된 것과 같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죽었던 이를 다시 살리는 엄쳥난 사건이었으며 결국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직결되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여동생들의 전갈을 받고도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사흘째에 이동하신 것은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암시하는 것이며 또한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가 살아남을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시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최고의회는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불안과 초조감을 나타내며 결국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11,47-48).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자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인간을 구원하게 하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친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친구의 생명을 살리시고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다음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2026. 3. 22. 사순 제5주일에 김원율 안드레아


입력날짜 : 2026-03-23 (06:40), 조회수 :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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