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요한 9,1-41)에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를 실로암으로 보내시어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엘리사가 아람의 장수 나만의 나병을 요단강에 가서 씻게 하여 치유한 기적사화와 유사합니다(2열왕 5,1-19). 예수님께서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신 것은 단순한 물리적 치유를 넘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이로부터 받는 은총’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요한 복음은 실로암을 ‘파견된 이’로 풀이하고 있으며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9,7).
이 태생 소경은 비록 육신의 눈은 닫혀있었으나 영혼의 눈은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 태생 소경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는 예수님의 명을 받든 후 그렇게도 염원하던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연의 장엄함과 형형색색의 꽃을 보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뼈저리게 감탄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뜨게 한 예언자를 만나기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사람의 아들’, 현존하는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진 분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식에 억매인 율법, 시기심과 탐욕에 갇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 육신의 눈은 뜨고 있으나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이었습니다. 태생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을 스스럼없이 예언자로 칭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는 바라사이들의 생각을 전적으로 뒤집는 사고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에게 “너는 완전한 죄 가운데에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 드는가?”라고 하면서 아집과 편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또한 엘리사가 이방의 장수 나만을 치유하였듯이 나병환자들도 치유해주셨습니다(마태 8장, 루카 5장). 비록 육신의 살갗은 짓무르고 썩어들어갔으나 그들의 영혼은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과 위선, 거짓,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영혼의 나병을 앓는 사람들은 영혼의 병과 함께 육신의 병도 치유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세기 가장 불우했던 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 그의 육신은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를 태어날 때부터 앓았으며 오로지 손끝의 촉각만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으나 그의 영혼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었습니다. 위대한 스승 앤 설리반을 만난 후 그는 세상과 소통하였으며 비상한 노력으로 3개국어까지 깨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20세기 가장 아름다운 수필로 선정된 자신의 글 “사흘 동안만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에서 “저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이 보고 싶구나! 서산에 지는 낙조가 보고 싶구나! 어머니 품에 안긴 채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구나!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의 눈동자가 보고 싶구나.”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조물주가 만드신 위대한 자연의 풍경과 사랑하는 스승의 얼굴을, 자연사 박물관, 생동하는 뉴욕의 거리를 보고싶다고 하였습니다. 순수한 그녀의 영혼은 모든 것을 경이로 받아들였고, 눈, 귀, 입이 멀쩡한 우리보다 더욱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일상에 찌든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든 아이의 얼굴에서 천사의 미소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조물주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창조의 결실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기억하는 ‘까마라와 함께 읽는 복음’에서 따온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러드리고자 합니다. 까마라 대주교는 올린다, 레치페의 대주교로서 한때 붉은 주교, 해방신학의 신봉자로 불렸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까마라 주교야말로 사람을 사랑하는 참된 박애주의자였고 권위와 체면에 찌든 성직자가 아니라 참된 인간의 모습을 가진 성직자였습니다. 책에서는 까마라 주교가 ‘저’라고 서술되지만 저는 ‘까마라 주교’로 대치하였습니다.
어느 여름날 까마라 주교는 리오 데 자네이로의 해변가를 추기경과 같이 드라이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비키니 수영복을 걸친 한 아름다운 여인이 바다에서 나와 두 분이 탄 자동차 앞을 걸어 모래사장을 지나갔습니다. 그 여인의 몸매는 완벽하게 아름다웠고 방금 수영을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까마라 주교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추기경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봅니다. 이윽고 까마라 주교가 입을 열어 말하였습니다.
“추기경님, 저는 오늘 조물주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2026. 3. 15. 사순 제4주일에 김원율 안드레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