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을 함께 하지 않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8항)
오늘 복음(요한 1,29-34)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을 합니다. 어린양이라 함은 구약의 파스카양을 의미합니다. 파스카양은 속죄(贖罪) 제물(祭物)로써, 파스카 축제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하여 피흘리며 도살되고 고통울 당하는 존재입니다. 요한복음은 3장 16절에서 하느님 사랑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은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분이라면 그냥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면 되지, 왜 굳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는가?”
베네딕토16세 교황님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8항에서 사랑이란 고통을 함께 겪는 것(Com-passio; 연민)이라고 정의하신 데서 사랑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실제로 고통받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을 받는 이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 고통이 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와같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로마 8,35)
나치 시대에 인간극한의 인권유린이 행해졌던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다인 엘리 위젤(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였습니다.
“슬픈 천사의 얼굴을 한 어린이가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날, 무시무시한 날들 중에서도 가장 소름끼치는 그날, 나는 뒤에 있던 어떤 사람이 신음하듯 내뱉는 말을 들었다. “하느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엘리 위젤이 발견한 하느님은 침묵만 하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교수대에서 함께 처형되셨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고통을 모르면서 인간의 고통에 동참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인간과는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고통을 모르는 하느님을 인간은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나치 시대에 암살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받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나가사키의 성자(聖者)’라고 불리운 나가이 다까시 박사는 고통울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겉치레만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정의·평화를 떠드는 것을 경멸하고 증오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몸소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연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며,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할 수 없다. 울어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어둠속을 헤매지 않고는 방황하는 사람이 길을 찾는데 도와줄 수 없다.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죽음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 뜨거운 입김을 느껴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도록 도와줄 수 없다.”
●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완성되었는가?
강생구속(降生救贖)이라 함은 하느님께서 강생(降生)하셔서 우리와 고통을 함께 하시고 십자가 상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뜻이 진정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을까요?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6항은 “우리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요한 1,29) 힘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치유에 대한 희망이 역사 안에서 생겨났습니다.”고 말합니다. 악이 번성하고 고통이 만연한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이러한 희망이 구원으로 이어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8,24)
베네딕토 교황님께서 ‘이 희망은 완성되지 않은 희망입니다’(동 회칙 36항)고 하신 말씀은 20세기 죄의 세력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세상에 새로운 예루살렘, 이상향(Utopia)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인류에게 주었음을 상기시킵니다. 마르크스는 인류에게 새 희망을 주었고, 이 희망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공산주의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온갖 고통과 폭력, 비참한 파괴만을 안겨주었습니다. 베네닉토16세 교황님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실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마르크스의 오류는 가장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의 자유를 망각하였습니다. 인간은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사회구조에 의하여 구원받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사랑을 제거한 자들은 언제든지 인간을 제거할 수 있음을!”(회칙 20항)
2026. 1. 18. 연중 제2주일 아침에 김원율 안드레아